<사설> 겉도는 중소.벤처기업 육성정책

 정보통신 분야 유망 벤처기업들의 도산이 최근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연초 국내 최대 PC용 주기판업체인 석정전자가 무너진 것을 시작으로 한국 벤처산업의 상징이던 한글과컴퓨터가 마이크로소프트에 넘어갈 뻔하더니 국내 멀티미디어 카드 시장의 양대산맥을 형성해온 가산전자와 두인전자, 전자출판 전문업체인 서울시스템이 연이어 부도를 냈다. 이들 업체는 그간 기술력이나 성장성 측면에서 모두 우수한 우량 벤처기업들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기술성·사업성 등에서 우수성을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정보화촉진기금을 지원받은 정보통신 분야 벤처기업이 7월 말 현재 81개사나 쓰러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멀쩡한 유망기업마저 별안간 「질식사」당하는 지경이니 정보통신 분야 기업들의 부도율이 치솟을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다.

 정보통신 분야 유망 벤처기업들의 부도 배경에는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 보면 모두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로 인한 높은 금리부담에다 매출부진과 이에 따른 운전자금 부족 등이 근본원인으로 귀결된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최근 잇따르고 있는 중견 벤처기업이나 중소 벤처기업들의 돌연한 부도사태는 정부가 거창하게 떠들고 있는 「중소기업 살리기」나 「벤처기업 육성」정책이 결국 유명무실한 탁상공론식이기 때문은 아닌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5월부터 자금경색을 풀어 중소기업을 살리겠다고 장담해온 정책당국과 금융기관들은 그동안 도대체 무엇을 했기에 이렇게 장래성 있는 유망기업들마저 잇따라 쓰러져도 속수무책인 최악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통분을 금할 수 없다.

 「금융대란설」이 사라졌다고 큰소리칠 일이 아니다. 시장의 불안심리가 많이 가라앉고 실세금리도 하향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신용이 약하고 담보능력이 부족한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은 오히려 가중되고 있다. 금융기관들의 대출기피 현상이 금융산업 구조조정과 함께 대형 부도사태의 후유증으로 그대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차입금이 25% 이하인데도 만기로 돌아온 1억5천만원을 연장해주지 않음으로써 도리없이 쓰러진 서울시스템의 경우는 현재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단적으로 설명해주는 사례다.

 정부가 세계은행(IBRD) 차관자금 4천억원이니 경영안정자금이니 해서 넉넉하게 자금을 풀고 있다지만 신규 대출은커녕 줬던 돈도 거둬가는 지경이라면 사정은 결코 좋아질 수 없다. 더구나 대기업들의 매출부진과 설비투자 감소, 조업단축으로 일감이 줄어드는데다 어음결제 기간이 늘어나 중소기업들은 견뎌낼 재간이 없는 것이다.

 정부당국은 중소기업 대출을 늘리겠다는 은행장들의 다짐이 어째서 지켜지지 않는지 창구현장을 살펴야 한다. 중소기업 지원이다,벤처기업 육성이다 해서 말만 요란하게 할 것이 아니라 우선 일시적 자금경색으로 유망기업들이 잇따라 흑자도산하는 일만은 없도록 해야 한다. 금융기관들도 이런 때일수록 심사기능을 강화, 신용대출을 과감하게 늘릴 필요가 있다. 더 이상 정보통신 분야 유망 중견·중소 벤처기업을 쓰러뜨려서는 안된다.

 이들 정보통신 분야 벤처기업이 살아야 하는 이유는 많다. 정부가 추진하는 벤처기업 육성책의 성공 여부는 기술개발력에 달려 있다. 정보통신 분야는 신기술이나 틈새기술을 개발할 가능성이 타 분야에 비해 월등히 높다. 벤처기업들이 정보통신 분야에 집중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보통신 벤처기업이 자꾸 쓰러지면 그만큼 우리가 개발한 신기술이 사라지고 경제난국을 극복할 기회마저 줄어드는 것이다. 또 최근 실업자 및 대학졸업자를 중심으로 강하게 불고 있는 창업의지를 꺾는 마이너스 효과를 가져와 지금 우리 경제가 반드시 통과해야 할 구조조정 과정을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구조조정은 불황산업에서의 퇴출과 유망산업으로의 진입이 자유로워야 소기의 목적을 거둘 수 있다. 정보통신 벤처기업이 활발하게 활동을 해야 신규 창업은 물론 기존 기업의 변신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특히 정보통신 벤처기업의 활성화는 고용사정을 안정시키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한다. 산업계 전체가 어려운 판에 유독 정보통신업계만 지원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겠지만 벤처기업의 속성상 정보통신 분야만큼 가능성이 큰 분야도 없다. 벤처기업들의 위기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긴급 점검, 실효성 있는 지원책이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