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생활 필수품의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전 세계인들에게 친숙해진 개인용컴퓨터(PC)가 올해로 탄생 20주년을 맞았다. 당시 PC 개발에 참여한 IBM 기술자들은 “우리의 흑백 모니터 PC가 훗날 세상을 뒤바꿔 놓을 줄 몰랐다”고 고백하고 있다. PC 사용자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Ctrl-Alt-Del’ 키를 발명한 장본인이자 PC 개발 역사의 산 증인이며 아직도 IBM에 재직하고 있는 데이비드 브래들리를 비롯, PC 개발에 참여한 주역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PC 탄생의 비화를 4회에 걸쳐 알아본다.
[iBiztoday.com=본지특약] ‘시장에 나온 어떤 컴퓨터보다 저렴하고 빠른 PC를 만들어 1년 안에 출시할 수 있도록 하라.’
지난 80년 여름 IBM(ibm.com)이 회사내 최고 엔지니어 12명을 모아놓고 전달한 특명이다. 이들은 특명을 받자마자 플로리다주 보카러턴으로 날아갔다. 당시 PC는 갓 태어난 제품으로 당시 컴퓨터시장은 애플컴퓨터·오스본·코모도·탠디라디오색 등과 같은 실리콘밸리 신생업체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 업체들이 80년 한해 판매한 PC라고 해봐야 모두 32만7000대에 불과했다.
IBM은 민첩한 조직에 속하지는 않았으나 PC의 잠재력이 매우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른바 ‘더티 더즌(dirty dozen)’이라고도 불리는 12명의 IBM 엔지니어들은 곧바로 체스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 결과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인 81년 8월 12일에 나왔다. 더티 더즌은 흑백 모니터에 메모리 64 , 판매가 2665달러의 PC를 내놓았다.
당시 개발자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바로 이 기계가 훗날 세상을 바꿔놓았다.
더티 더즌의 한 사람이었던 마크 딘은 “아무도 PC가 그렇게 대성공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PC는 81년 이후 수십억대가 팔려나가 기업·학교·오락 등 현대인의 생활 전반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PC는 생산성을 엄청나게 개선했으며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기업과 개인에게 부를 안겨줬다. IBM의 더티 더즌 팀은 오늘날에도 사용되고 있는 컴퓨팅의 표준을 수립한 장본인들이다. 이를 토대로 많은 신생업체들이 번창해 나름의 영역을 개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더티 더즌의 또 다른 팀원이었던 데이비드 브래들리(사진)는 “우리는 우선 기업용으로 기계를 만들었는데 당시 시장에 나온 다른 제품보다 훌륭했다”며 “그 기계는 가정에서도 사용이 가능해 큰 인기를 모았다”고 설명했다.
당시 프로젝트가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보카러턴에서 진행된 개발작업을 지휘한 IBM의 베테랑 엔지니어 필립 에스트리지는 지난 85년 댈러스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망하고 말았다. 에스트리지는 생산 담당 부사장이었다. 그러나 정작 PC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업체는 IBM이 아니라 IBM에 프로그래밍 언어와 운용체계(OS)를 8만달러에 판매한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com)였다. 마이크로소프트는 운용체계에 대한 라이선스 권리를 쥐고 81년 이후 거의 모든 PC에 설치된 MS도스와 그 이후에 나온 윈도(windows)의 판매를 통해 수십억달러를 벌어들인 것이다. 지난 한해만 해도 PC 제조업체들이 판매한 PC는 1억4000만대가 넘는다.
IBM은 PC 아키텍처를 공개하고 마이크로소프트가 아닌 다른 회사로부터 운용체계를 받아 쓰기로 결정함에 따라 매년 성능은 개선됐지만 가격은 계속 추락하는 PC를 만들어 냈다. ‘밸리의 불, PC의 탄생’이란 책을 공동 집필한 마이클 스웨인은 IBM이 PC 아키텍처를 공개하기로 한 결정 때문에 ‘또 하나의 PC업체’로 전락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당시 더티 더즌에서 엔지니어링 관리를 맡았던 데이비드 오코너는 “공개 아키텍처는 올바른 결정이었다”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개발한 표준이 국제 표준으로 채택됐고 개발비용도 더욱 떨어져 수많은 개인과 기업체가 컴퓨터를 이용할 수 있게 됐다“고 반박했다.
더티 더즌에서 최고의 베테랑 프로그래머로 일했던 멜빈 핼러만은 많은 혁신기술의 개발을 주도한 IBM이 개발 기술을 수익을 내는 방향으로 활용하는 데는 둔감했다고 지적했다.
일명 ‘빅 블루(big blue)’라고도 불리는 IBM의 관료주의적 조직체계와 신속성 결여 때문에 IBM은 많은 경쟁사들이 각 분야에서 선두를 차지하도록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IBM은 애초에 PC분야를 공략하기로 결정했을 때 민첩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IBM은 1년밖에 안되는 짧은 개발기간 때문에 여러 문제에 관해 현실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IBM은 모든 부품을 새로 개발할 시간이 없었기에 기존 부품으로 개발을 시작했다.
트랜지스터 이전 시대부터 개발자 생활을 한 IBM의 조지프 사루비는 부품구매 업무를 맡다가 보카러턴으로 옮겨 컴퓨터 제조작업을 감독하게 됐다. 사루비는 “IBM의 명성과 신뢰 때문에 모두들 컴퓨터 개발에 대해 신경이 날카로웠다”고 회고했다. 이 프로젝트를 승인한 IBM 경영진은 이 팀이 IBM 기술을 전혀 쓰지 않아도 되고 임무수행을 위해서라면 어떤 시간제약도 받지 말고 개발에만 전념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개발단계까지 비밀이 유지됐다.
IBM은 당시 인텔이 내놓은 신제품인 8088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사용하기로 했지만 인텔에 대해 어떤 제품을 개발중인지는 전혀 밝히지 않았다. 인텔측 엔지니어들과 IBM PC 개발팀이 회의 때문에 만날 때도 양측 사이에 커튼을 쳐놓고 앉은 적이 있을 정도다. 인텔의 매출은 지난 80년 8억5400만달러에 머물렀으나 지난해에는 337억달러 이상으로 급증했다.
이와 관련, IBM은 PC 판매업체들에 기술에 관한 비밀협정을 맺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부 업체들은 IBM이 자신들의 기술을 노릴 것을 우려해 서명을 망설였는데 이 중 하나가 당시 인기가 있었던 운용체계업체 디지털리서치였다. IBM이 이 회사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은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 덕분이다. IBM은 이미 설립 5주년을 맞은 마이크로소프트와 프로그래밍 언어 문제로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게이츠와 공동 창업자 폴 앨런은 세계 최초의 미니컴퓨터용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해 명성을 얻고 있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디지털리서치의 운용체계를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은 있었지만 운용체계에 대한 소유권이 없어 IBM에 이를 제공할 수 없었다. 따라서 게이츠는 IBM을 대신해 디지털리서치와의 회의를 주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웨인에 따르면 디지털리서치는 IBM이 제시한 요구조건에 대해 불만스러워했다. 디지털리서치는 자사 운용체계를 IBM에 완전히 넘기지 않고 사용권한만을 허용하고 싶어했다.
IBM은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에 다시 의뢰했고 이를 계기로 게이츠는 훗날 ‘금세기 최대의 거래’로 평가받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제이안기자 jayahn@ibiztod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