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에 지는 태양이 반사되어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한강을 보며 공항에서 올림픽 대로를 따라오면, 어느새 장시간의 비행 여정에도 불구하고 난 피로가 가셨다. 밤섬을 지날 때쯤 FM라디오에선 영화 ‘유리의 방’ 테마곡 인 칸초네 음악이 흐르고 나는 그 선율에 잠시 뒤를 돌아보곤 했다.
밤섬에는 이미 환경에 익숙해져 있는 많은 텃새가 둥지를 틀고 나름대로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매년 홍수로 인하여 생태계가 파괴되곤 하지만, 어느새 다시 새로운 질서로 복원되곤 한다. 우리 벤처 산업도 경기에 따라 산업이 송두리째 흔들리기도 하지만, 또 그 속에서 자생하며 나름대로 기반을 잡아가는 것이 그 밤섬의 생태계를 닮아있다.
밤섬을 지나면서 생각했다. 나는 한강의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에 서식하는 텃새가 될 것인가? 아니면 높이 날아 오를 것인가? 1997년5월 초 컨실리움 한국 지사장을 14년 간 재임하고 있었던 때, 미국 실리콘밸리에 있는 반도체 전문 장비업체의 어플라이드머트리얼사가 컨실리움을 인수합병했다. 당시 나는 컨실리움사의 한국지사장에서 아시아 지사장 승진 발령이 나 있는 상황이었다. 본사 사장으로부터 여느 때와는 달리 주제나 목적이 적혀있지 않은 일정만 명기된 본사전략회의 참여요청 메일을 받고 나는 샌프란시스코행 비행기에 올랐다.
회의의 주제를 모르니 자료 준비를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채, 늘 준비하던 대로 예상매출과 실적 및 시장에 대한 조사 자료를 준비했다. 외국계 회사 지사장생활 14년여 기간동안, 나의 비행기록은 총 누적 마일리지가 국내외 항공사 약 10여 개를 합산해 약 230만 마일. 비행기안에 갇혀서 생활 한 날 수를 계산 해보면 약 120일, 약 2880시간을 체공하며 생활했다.
그러나 이번 출장은 느낌이 달랐다. 다른 때처럼 목적지에 도달해서 이어질 업무에 대한 설명서나 출장 보고서를 준비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에 곰곰이 내 자신의 미래와 그간의 일들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은 갖게 됐다.
출장에서는 예견한 대로 미국 본사의 구조조정에 대한 문제가 생겼다. EU와 미주 및 아시아지사의 인원을 60%까지 구조 조정하라는 지시가 일방적으로 하달됐다. 나는 차마 우리 직원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가 없었다. 지난번 IMF 이후에 몇몇 직원들은 대기업에서 일방적인 구조조정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사 사장과 담판을 짓기로 했다. 나를 포함한 전 직원 모두를 구조조정하고, 지사가 아닌 별도의 법인으로 대리점체제로의 전환을 건의한 것이다.
임원회의 약3일 째 되던 날, 이 수정제안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을 듣고서 새로운 모험에 도전하게 됐다. 결국 컨실리움의 전 직원과 별도의 조직으로 관리하고 있던 팀을 모두 합해 회사를 설립했다. 본사 회의를 마치고 귀국해 직원들과 함께 성수대교를 지나는 차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 기적을 이루어보자’는 뜻으로 의기투합해 회사 이름을 미라콤(Miracom, Miracle of Computing)으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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