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kitschy)라는 표현이 있다. 사전에는 ‘속악하다(속되고 고약하다)’ 등으로 풀이하고 있는 이 낱말은 19세기 유럽의 급속한 산업화 여파로 예술품을 구하고 싶은 욕망이 강해진 일반인을 대상으로 값비싼 진품 대신 이른바 ‘짝퉁스러운’ 물품들을 제작해 저렴하게 판 데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1870년대 독일 남부의 예술가 사이에서 ‘물건을 속여 팔거나 강매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유래가 된 독일어 ‘kitsch’는 인기에만 영합해 나온 극의 줄거리나 시시한(엉터리) 수작, 값싸고 천하며 깊이가 없어 겉만 번지르르한 것을 뜻한다.
키치는 가볍고 그럴듯하지만 창의성 떨어지는 모조품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은 이후, 현대에 이르러서는 점차 소수 귀족을 대상으로 창조되던, 전통을 지닌 고급 문화·예술과는 달리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예술 장르의 하나로까지 해석되고 있다. 대체로 키치를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해석할 때에는 매체를 통해 복제됨으로써 소비자를 만나는 대량매체 시대의 대중문화가 지닌 보편적 속성이나 흐름을 일컫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한 대상을 가리켜 ‘키치스럽다’거나 ‘키치적’이라고 할 때는 본래의 ‘천박하다’는 인상을 담은 표현이 된다. ‘대중’과 ‘문화’가 그러하듯 워낙 다층적인 흐름을 포괄하는 용어로 발전한 덕인지 키치는 2004년 영국의 번역회사 투데이 트랜슬레이션스(Today Tranlations)가 발표한 ‘번역하기 어려운 영어 낱말’ 10위에 오르기도 했다.
문화 조류가 아닌 한 대상을 지칭할 때의 ‘키치’는 어원의 천박함이나 비표준성을 감내하고 한국의 대중이 흔히 쓰는 말로는 싸구려, 삼류를 뜻하는 왜곡된 일본어 표현 ‘쌈마이’ 또는 요즘 인터넷에서 한창 유행하는 ‘병맛’(‘병신맛이 난다’의 준말, 장애인 비하 의도 없음을 양해 바람) 등으로 소개할 수 있겠다. 어느 사이엔가 일부 창작자는 이렇듯 명백한 비하 표현에 가까운 키치를 오히려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이들은 의도적으로 키치를 표방하며 대중을 자극하거나 풍자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표현력의 한계를 오히려 천박함, 가벼움을 내세운 키치적 스타일로 승화시키는 면모를 보인다. 전자든 후자든 현대 대중문화에서 ‘키치스러움’은 쓰기에 따라 ‘즐거운 뻔뻔함’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원초적이고 말초적인 쾌감을 끌어내는 효과가 있다는 점도 한몫한다.
한국 만화에서 이러한 키치스러운 면이 유난히 부각되고 득세하기 시작한 때가 바로 초고속 인터넷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다. 커뮤니티 게시판, 블로그 등 대중을 만나는 창구의 벽이 급격히 낮아지며 차마 잘 그렸다고는 할 수 없는 그림, 이른바 ‘비호감’ ‘막장스러운’ 소재에 통상적인 이해를 거부하는 듯한 어이없는 개그도 개성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한다. 인터넷 포털은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키치스러움을 대중 트렌드화하는 데 성공한다. 조석의 ‘마음의 소리’나 귀귀의 ‘정열맨’ ‘열혈초등학교’ 같은 작품은 ‘멋지다 마사루’류의 개그가 국내 작가에게서도 나오고 또 먹힐 수 있게 됐음을 알리는 중요한 지표다.
물론 이러한 키치적 요소는 일종의 ‘독특한 코드’로 받아들여지는 것일 뿐 이를 즐기는 대중이나 웹툰의 수준이 낮다는 식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반대로 키치적 요소가 국내 웹툰 작품의 중요 축을 차지하게 된 요인도 콘텐츠의 무료·초저가 유통이 가능해짐에 따라 대중이 용인하는 질적 기대치와 대중에게 보일 수 있는 창구의 벽이 기존에 비해 낮아졌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인기는 플랫폼 환경을 비롯한 외부 변화에 약할 수밖에 없는 만큼 인터넷 포털 노출도에 따른 인기를 작품 평가의 절대 기준으로 삼는 태도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서찬휘 만화 칼럼니스트 seochnh@manhwa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