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익, 삐익~ “야 됐다, 됐어!”
1982년 5월 구미와 서울대 연구실 두 곳에 놓인 커다란 컴퓨터 앞에 머리를 맞대고 있던 연구자들이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인터넷 데이터를 주고받은 장면이다. 인터넷 강국 한국이 첫걸음을 뗀 순간이다.
경북 구미 한국전자기술연구소(KIET)와 서울대 컴퓨터공학에 있던 두 대의 중형 컴퓨터가 각각 고유 인터넷 주소를 할당받아 데이터 패킷을 송수신했다. 인터넷 접속 표준 프로토콜인 TCP/IP 방식으로 이뤄진 첫 인터넷 연결이다. 미국에 이어 세계 두 번째, 아시아에선 처음이었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나중은 창대했다=당시 구축한 국내 최초 인터넷망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의 데이터 전송속도는 1200bps였다. 초당 150글자를 주고받을 수 있는 수준이다.
지금 일본 게이오대 석좌교수이자 KAIST 명예교수로 있는 전길남 박사가 몇몇 젊은 엔지니어와 대학원생으로 구성된 연구팀을 이끌고 연구를 주도했다. 전 교수가 우리나라 인터넷의 아버지로 간주되는 이유다.
우리나라는 국내 연구자 사이의 기술 교류를 위해 계획적으로 인터넷 연구를 추진했다. 관련 연구자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네트워크가 생긴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이다. 그래서 당시 우리나라의 전반적 기술이나 경제 수준이 높은 편이 아니었지만, 다른 나라에 비해 인터넷 도입이 도리어 빨랐다.
미국은 1970년대에 인터넷 연구를 시작한 인터넷의 선구자다. 하지만 군사용 네트워크인 알파넷(ARPANET)에서 TCP/IP로 전환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은 1983년이다. 우리나라보다 오히려 1년 늦은 셈이다.
TCP/IP 개발을 주도한 빈트 서프 박사도 2012년 5월 열린 `한국 인터넷 30주년 기념 콘퍼런스`에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한국의 인터넷 연구가 이렇게 일찍부터 이뤄졌다는 점에 깜짝 놀랐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어 2년 후인 1984년 우리나라는 공중정보통신망(PSDN)을 개통,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패킷보유망을 보유한 국가가 됐다. 같은 해 이메일 수발신도 가능해졌다. SDN을 미국 CSNET에 연결, CSNET 관리자와 의사전달을 목적으로 이메일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이듬해 한국데이타통신에서 상용 이메일 서비스를 시작했다.
전길남 교수는 1986년 `.kr` 도메인을 위임받아 국가 `.kr` 관리자로 활동했다. `.kr` 관리 권한은 이후 KAIST에서 한국전산원으로 이양됐다. `.kr` 도메인 사용은 폭발적으로 증가, 2008년 등록 건수가 100만건을 넘었고, 현재 130만건의 `.kr` 도메인이 쓰이고 있다.
◇세계 최강 한국 인터넷이 태동했다=PC통신이 등장하며 우리나라 인터넷 확산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1986년 최초의 PC통신 `천리안` 서비스가 문을 열었고, 이어 하이텔, 나우누리, 유니텔 등이 나오면서 PC통신 가입자가 350만명을 넘는 등 전성기를 맞았다. 천리안을 비롯한 이들 PC통신은 국내 데이터베이스 서비스 산업 발전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정보를 쌓아두고 찾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1994년 KT에서 코넷이란 이름으로 인터넷 상용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연구 목적의 대학교와 연구 기관의 전유물이던 인터넷을 일반인도 쓰기 시작했다. 데이콤, 아이네트 등의 기업이 나타나 인터넷 접속 서비스를 제공했다.
1998년엔 두루넷을 시작으로 초고속인터넷 서비스가 시작돼 급속히 보급되면서 `인터넷 강국` 한국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상용 서비스 4년 만인 2002년 초고속인터넷 보급이 1000만 가구를 넘었다.
당시 코넷의 인터넷 전송속도가 9.6kbps였다. 현재 초고속인터넷 속도는 보통 100Mbps 수준으로 당시에 비해 거의 1만배 이상 빨라졌다. 현재 시범 구축 중인 기가비트 인터넷이 상용화되면 지금보다 10배 빠른 인터넷 서비스가 가능해진다.
초고속인터넷이 보급되면서 혁신적인 인터넷 서비스들이 잇달아 나타나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검색, 이메일, 뉴스, 커뮤니티 등을 한꺼번에 제공하는 포털 서비스가 PC통신을 대체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이 무료 웹메일 `한메일`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 1997년이었다. 1999년엔 `다음 카페`도 시작했다.
1999년은 네이버가 등장한 해다. 네티즌 스스로 묻고 답하는 `지식인` 서비스 인기에 힘입어 최고 검색 포털로 자리 잡아 아직도 1등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야후, 프리챌, 싸이월드, 아이러브스쿨 등 수많은 서비스가 인기를 끌다 사라졌고, 온라인게임도 인터넷 보급과 함께 인기를 얻었다.
2000년 당시 1904만 명이던 인터넷 이용자 수는 2010년 3701만명을 넘었다. 전 국민 네티즌 시대가 열린 것. 인터넷 이용도 40·50대 중장년층이 주도하게 됐다. 이메일, 인터넷 쇼핑, 블로그, 소셜 네트워크 등 온라인 서비스는 지속적으로 우리 일상에 파고들었다. 보스턴컨설팅에 따르면 2010년 우리나라의 인터넷 경제 규모는 86조원이고 GDP 대비 비중은 7%에 이른다.
하지만 컴퓨터 바이러스와 스팸, 인터넷에서의 사생활 침해와 온라인 폭력 등은 인터넷 사회의 그늘진 뒷모습으로 남았다. 온라인 공간에서의 윤리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한 시점이다.
◆ 전길남 KAIST 명예교수
“1982년 당시 세계에서 인터넷 연결에 성공한 나라는 미국과 한국뿐이었습니다.”
전길남 카이스트 명예교수(69)는 1982년 5월 구미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간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 연결이 세계에서 두 번째였다고 회상했다.
전 교수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인터넷은 말이 안 되는 프로젝트였다”면서 “서울대 연구실이 비가 샐 정도로 가난한 나라 한국에서 세계 두 번째로 인터넷 연결이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학계와 정부, 기업이 합심해 세계 최고 기술을 탄생시켜 보자는 열망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전 교수는 1979년 한국 정부가 외국에서 활동 중인 과학자를 유치할 때 귀국했다. 가난한 조국이 기술 발전을 위해 과학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는 것을 보고 전 교수도 뭔가 조국을 위해 공헌하겠다고 결심했다.
전 교수는 미국에서의 경험을 살려 네트워크 개발을 시작했다. 당시 연구에 KT, 삼성전자, LG전자 등 기업도 적극 참여했다. 인터넷 연구에 들어가는 통신 비용만 현재 금액으로 1년에 2억~3억원이 들어갈 정도로 막대했음에도 불구하고 KT가 통신비를 전액 투자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대기업도 글로벌 선진국의 사례와 기술을 참조해가며 전 교수의 연구를 도왔다. 덕분에 삼성에서 TCP/IP를 이용한 라우터를 1985년 내놓을 수 있었다. 세계 최초로 라우터를 개발한 시스코와 엇비슷한 시기였다.
전 교수는 “만약 1982년도에 프로젝트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한국 네트워크 개발은 10년가량 늦었을 것”이라며 “주변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1992년께 인터넷 연구가 시작된 것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네트워크 발전 역시 1990년 이후였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 교수가 네트워크 개발을 주도했던 것은 국내 후학들을 위해서였다. 전 교수는 “미국 MIT, 스탠퍼드 등 미국 유수 대학들이 우수 논문을 인터넷에 올리고 인터넷 연결을 통해 바로 받아가라고 했다”면서 “한국에서도 미국 명문대와 똑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 학생들을 교육시키고 싶었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1년의 60% 이상을 일본에 머물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는 곳이 어디냐는 질문에 `사이버 공간`이라고 답한다. “나는 물리적으로는 일본에 있지만 한번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내가 거주한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면서 “내가 사는 공간은 사이버 세상”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사이버 세상을 창조한 `대한민국 인터넷의 아버지` 전길남 교수는 우리가 사는 사이버 공간을 정화하고 사랑하기 위해 역기능과 순기능을 모두 인정하고 더 나은 인터넷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전 교수는 우리나라가 초창기부터 인터넷에서는 세계 리더그룹에 있었으니 그 경험을 살려 글로벌 시장을 선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내에서 인터넷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먼저 경험했다는 것은 좋은 점과 나쁜 점 모두 앞서갔다는 뜻”이라며 “개인정보보호 침해, 인터넷 중독, 악플 등 인터넷의 역기능 또한 우리가 먼저 경험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타국과 경험을 공유해 진정한 선진국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우리는 자랑스러운 문화는 내세우고 싶어 하지만 부끄러운 과거는 가능한 감추려는 습성이 있다”면서 “최진실 자살사건 등 인터넷의 역기능으로 인한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 역시 우리가 경험한 인터넷의 단면인 만큼 인터넷을 누구나 사랑하는 시스템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나쁜 점까지 인정하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세희기자 hahn@etnews.com
[표] 1990년대 국내 인터넷 주요 사건
1990년 미국과 인터넷 연결:한미 인터넷 전용선 개통, 선진국 최신 과학기술 정보 검색 및 유통이 활발해짐
1991년 국내 최초 인터넷 게시판 개설: 국내의 일반 통신 이용자에 인터넷 소개. 국내외 사용자 커뮤니케이션 수단 제공 및 BBS 확산 계기
1993년 최초 웹사이트 개설(cair.kaist.ac.kr): 국내 최초 웹서버 개발·운영. FTP 아카이브 및 메일링리스트 호스트 서버로 활용돼 국내 웹 발전에 공헌
1994년 국내 최초 인터넷 상용 서비스 개시: 인터넷 상용 서비스업체(한국통신, 데이콤, 아이네트)를 통해 일반인에 인터넷 서비스 시작. 인터넷 이용자 수 폭증
1996년 인터넷 통한 그래픽 온라인 게임 서비스 제공: 국내 최초의 그래픽 온라인 게임 `바람의 나라` 개발
1998년 초고속 인터넷 상용화
1999년 네이버 정식 서비스 개시
1999년 최초 인터넷 뱅킹 서비스 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