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은 초기 정보통신부의 상징이자 주력 사업이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수립된 기본계획을 토대로 한국은 10년 뒤 명실상부한 인터넷 강국으로 도약했다.
전국에 `정보고속도로`를 뚫겠다는 이 야심찬 계획은 우리나라를 산업화에서 정보화 단계로 진입시킨 주요 동력이었다.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계획은 1993년에서 1994년까지 2년여에 걸쳐 모양새가 갖춰졌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국가사업으로 추진됐다.
무려 2015년까지 20년을 보고 장기적으로 마련된 프로젝트는 새로운 환경을 인위로 만든다는 점과 수십조 단위 대규모 예산이 투입된다는 점에서 당시로선 무모하리만치 도전적인 정책이었다. 당연히 추진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군사 정권이 종식되고 들어선 첫 민간 정부는 새로운 경제 비전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초기 방향 설정에서 정보통신 분야는 하마터면 비전 수립에 끼지 못할 뻔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 1990년대 초반은 눈에 보이는 이른바 `굴뚝 산업`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던 시기였다.
오히려 정보통신은 투자를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체신부가 주도한 전국 전화 자동화 등 통신 분야에 예산이 과투자됐다는 여론도 공감을 얻었다. 무엇보다 정부 안에서 정보화의 필요성을 체감하는 이가 부족했다.
1993년 5월 초 홍은동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열린 청와대 경제비서실 회의는 이러한 인식을 뒤집는 계기가 됐다. 이 회의는 문민정부 경제정책 방향성을 설정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당시 청와대에 파견 중이던 석호익 과장(KT 부회장 역임) 등 체신부 직원들은 초고속인터넷 필요성을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1970년대 반대여론을 뚫고 경부고속도로 건설했던 사례를 들며 `정보 고속도로`가 사회 전반에 가져올 변화를 그려나갔다.
미국 등 선진국은 이미 이와 비슷한 정보화 전략을 수립해 실행에 들어갔기 때문에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체신부는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야 한다”는 목표를 전면에 내세워 여론 뒤집기에 나섰다.
이 같은 노력에 청와대가 반응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내년 예산에 국가 정보화를 위해 더 많은 재원을 투자하라”고 지시했다. 목표만 설정된 사업에 이례적으로 1000억원 예산이 배정됐다.
1993년 7월 2일 김영삼 대통령은 `신경제 5개년 계획`을 발표했다. 국가정보화 및 정보산업 육성이 핵심 과제로 등장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국제화 시대 선두주자가 될 수 있도록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며 “정보화 시대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면 낙오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예산이 배정되고 청와대가 나서자 사업에 속도가 붙었다. `초고속정보통신망`이란 명칭도 이때 결정됐다. `정보통신`이라는 용어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체신부는 1993년 7월 15일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실무추진단을 내부에 구성했다. 추진단의 첫 번째 과제는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한 추진기구와 계획의 얼개를 만드는 것이었다.
해를 넘겨 1994년 1월 13일 윤동윤 당시 체신부 장관은 대통령 새해 업무보고에서 “초고속정보통신망구국사업을 3단계로 나누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2015년까지 45조원을 들여 전국에 초고속망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이었다. 2015년까지 전국 가정에 광케이블을 설치하는 초고속공중정보통신망에는 42조504억원, 2010년까지 공공기관·연구소·대학·주요기업을 연결할 초고속국가정보망에는 8910억원, 핵심기술과 응용서비스개발에 1조8363억원을 투자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하지만 난관이 남아 있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추진기구를 만드는 작업이 만만치 않았다. 사업 성격상 부처협력이 필수였지만 체신부에 대한 견제가 심했다. 체신부는 추진위원장을 대통령이 맡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국무총리가 맡는 것으로 정리됐다.
1994년 4월 14일 정부는 정부종합청사에서 이회창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 장관 회의를 열고 `초고속정보통신시스템구축 기본계획`과 추진체제를 결정했다. 이어 8월 17일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기획단이 출범했다. 국무총리가 추진위원장을 맡고 체신부를 비롯해 상공부, 경제기획원, 재정경제원, 통상산업부, 과기처, 등 관련 부처와 한국통신, 데이콤 등 통신사업자, ETRI, KISDI 등 연구소가 협력하는 범부처 조직이었다.
1995년 3월 총사업비만 44조8000억원으로 한 해 정부예산(1994년 43조2500억원)을 넘는 초대형 국책사업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이 확정, 발표됐다. 앞서 1995년 1월 출범한 정보통신부의 주력 프로젝트였다.
◆ 석호익 체신부 과장(전 KT 부회장)
“산업화는 300년 늦었지만 정보화는 2년에서 5년 정도 격차밖에 나지 않습니다. 문민정부는 정보화를 국책사업으로 하고 산업고도화도 이에 맞춰 진행해야 합니다.”
1993년 5월 석호익 당시 체신부 과장은 홍은동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갓 출범한 문민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성을 설정하는 자리였다. 서열상 가장 마지막에 발표 기회를 가진 석 과장은 위기감을 느꼈다.
“당신 분위기가 체신부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경제 관련 부처가 주축이 되다 보니 정보통신 투자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 대체적인 흐름이었어요. 전국 전화 자동화 등 그동안 정보통신 수준을 어느 정도 끌어올렸으니 도로, 철도, 항만, 공항 같은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습니다.”
전두환 정권 말에 청와대에 들어간 석 과장은 이미 정보 고속도로 필요성을 체감했다. 회의적인 여론이 만만치 않았지만 미국 등 선진국이 앞서 계획을 수립하는 단계에서 더는 우리나라도 사업을 늦출 수 없다는 절박함이 앞섰다.
결국 이날 회의에서 박재윤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초고속정보통신망의 필요성에 깊이 공감했다. 석호익 전 KT 부회장은 “비로소 청와대와 연결고리가 만들어진 것”이라고 회상했다.
석 전 부회장은 “사실 김영삼 대통령은 선거공약에 정보산업담당 특별 보좌관 신설을 내걸 만큼 정보통신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며 “목표만 있던 계획이 이때를 계기로 구체적인 밑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석 전 회장은 초고속국가정보통신망 구축으로 국내 정보통신 생태계가 만들어졌다고 자평했다. 경부고속도로를 계기로 자동차 산업이 활성화됐듯 정보 고속도로를 중심으로 콘텐츠, 정보화 등 수많은 산업이 발전할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이 계획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종합정보통신망(ISDN), 비대칭디지털가입자회선(ADSL), 광대역통합망(BcN) 개발 및 보급 등으로 이어져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 인터넷 강국으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전국 곳곳에 초고속 통신망이 깔리자 남들 따라가기 바빴던 우리나라는 1990년대 이후 정보화 분야만큼은 앞설 수 있었다. 휴대전화 보급률이 100%가 넘고 매년 인터넷 속도에서 1위를 기록하는 정보통신 강국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석 전 회장은 이후 1995년 출범한 정보통신부로 자리를 옮겨 후에 KT 부회장까지 지내며 정보통신 외길을 걸었다. 초고속국가정보통신망 계획 수립단계에서 실행까지 전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셈이다.
그는 “결국 리더의 결단과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실행력이 국가 정책의 성패를 좌우한다”며 “초고속정보통신 구축은 성공적인 정책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입증한 대표 사례”라고 강조했다.
[표]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기본계획 수립 연표
1993년 7월. 김영삼 대통령 `신경제 5개년 계획` 발표. 국가정보화 및 정보산업 육성이 핵심 과제 선정
1993년 7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실무추진단 구성
1994년 1월. 대통령 새해보고에서 3단계 추진방안 보고
1994년 4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기본계획 수립
1994년 8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기획단 출범
1994년 11월. 초고속정보통신망 구축 종합계획 수립
1995년 3월. 초고속정보통신망구축 계획·예산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