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와 LG에 가장 뼈 아팠던 사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지난 1999년 4월 체결됐던 반도체 빅딜을 꼽지 않을까. 이 사건은 정부가 시장 경제에 개입해 기업의 경쟁력을 깎은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도 계속 회자되고 있다.
지난 1998년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대통령의 평생 숙원이었던 `재벌 개혁`을 주장하며 그 표본으로 재벌 빅딜을 추진했다. 삼성자동차를 대우자동차에 넘기고 대우전자는 삼성전자에 넘기겠다는 것이었다. 또 LG반도체를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의 전신)에 흡수시키겠다는 게 재벌 빅딜의 골자였다. 반도체 빅딜의 경우 현대는 LG가 보유한 LG반도체의 대주주 및 특수관계인 지분 59.98%를 2조5600억원에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이 중 1조5600억원은 우선 현금과 유가증권, 즉 데이콤 지분으로 지불하며 나머지 1조원은 1년 거치 2년 분할 상환하기로 합의했다.
반도체 빅딜은 이후 수년간 많은 논란을 낳았다. 당시 시장 상황은 LG반도체가 현대전자보다 발전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기 때문에 합병을 단행한다면 현대전자를 LG반도체에 넘기는 것이 정도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김대중 정부의 당시 행보는 대북 사업과 관련한 정치적인 이유로 현대를 지원하려는 목적이 컸다는 게 중론이다.
◇LG와 현대의 동반 침체=그러나 LG반도체를 인수한 현대전자는 빅딜 1년 만에 자금난에 빠졌다. 빅딜 당시 발행한 대규모 회사채에 발목이 잡힌 탓이다. 현대전자는 빅딜 후 시스템 업체들과의 장기 공급계약 비중이 늘어나는 등 안정적인 마케팅 기반을 확보했으며, 비메모리에 강했던 LG반도체를 합치면서 반도체 품목도 다양해졌다. 하지만 워낙 부채 부담이 크다 보니 꾸준한 투자가 생존의 기본 조건인 반도체 산업에서 적기에 제대로 투자를 하지 못했다. 회사의 장래가 불투명해진 이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반도체 경기가 악화되면서 현대전자는 결국 10조원의 빚을 지고 지난 2001년 채권단으로 넘어가게 된다.
LG는 LG대로 다른 재벌 그룹들의 방해에 시달려가며 반도체 사업을 넘긴 후 대체 사업으로 데이콤을 인수했지만 되레 화를 입었다. LG그룹은 오랜 숙원이었던 데이콤을 인수하고 정상화에 자금을 쏟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반도체 빅딜이 없었다면=정부 주도로 추진된 빅딜 가운데 반도체 사업 맞교환은 현재 `실패`라는 평가에 무게가 실린다. 반도체 사업을 억지로 접어야 했던 LG는 여전히 아쉬움을 접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빅딜이 없었더라도 LG반도체와 현대전자 등 당시 반도체 기업 간에 또 다른 인수합병이 이어졌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지만 시장의 속성에 맡기지 않은 무리한 합병으로 산업사가 틀어졌다는 비판만은 공통적이다.
지난 2007년 LG는 자사 60주년 사사를 편찬하며 반도체 빅딜 당시를 언급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LG는 `고객에 대한 열정, 미래를 향한 도전-LG 60년사`에서 “인위적 반도체 빅딜은 한계사업 정리, 핵심역량 집중이라는 당초 취지와 어긋나는 결과를 초래했다”며 “그 평가는 후일 역사의 몫으로 남게 됐다”고 평가했다.
LG는 또 “당시 정부 주요 인사는 LG가 반도체 빅딜에 불응하게 되면 채권 은행단을 통해 만기대출금 회수조치를 당하는 등 금융 제재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면서 “이후 구본무 회장은 1999년 1월 6일 청와대를 방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반도체 포기 의사를 밝혔다”고 적었다.
LG는 또 반도체 빅딜에 앞서 LG반도체와 현대전자의 평가기관 선정 과정에 얽힌 비사도 밝혔다. LG는 “당시 업계에서는 반도체 합병 무용론이 제기됐으나, 정부의 강경 방침으로 1998년 11월 11일 반도체 통합을 위한 외부전문 평가기관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추천한 미국 컨설팅업체인 ADL이 선정됐다”면서 “그해 12월 24일 ADL 평가보고서가 공개되자 내용이 편파적이라는 시비를 부르기도 했다”고 기술했다.
◇하이닉스, SK 품으로=한편 현대전자가 채권단에 넘어가면서 변경된 사명이 지금의 `하이닉스`다. 하이닉스는 채권단 공동관리 상태를 10년 넘게 유지하면서 여러 차례 지분 매각을 시도했다.
마침내 2012년 국내 최대 이동통신사인 SK텔레콤은 미래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하이닉스의 새 주인으로 등극했다. 하이닉스는 `SK하이닉스`로 사명이 다시 한 번 바뀌고 십수년의 채권단 관리에 이어 SK계열사로 자리 잡았다.
SK텔레콤은 하이닉스 인수로 `유형의 제품` 사업에 진출, 기존 통신 서비스와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SK텔레콤은 통신 서비스 회사지만 하드웨어(HW) 사업을 수차례 시도했다. 하지만 통신 시장에서 독보적인 입지에도 불구하고 HW 사업에서는 번번이 쓴맛을 보고 말았다. 관계사 SK텔레시스가 휴대폰 단말기를 생산했지만 반짝 성과를 낸 이후 이렇다 할 성과가 없어 사실상 사업 유지가 힘든 상태다.
SK텔레콤 관계자는 “애플이 강력한 것은 제품(아이폰)과 플랫폼(iOS)을 함께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서비스 업체와 손을 잡으면서 통신 시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면서 “SK텔레콤은 서비스에 이어 플랫폼까지 사업 역량을 확장했으나 궁극적으로 애플·구글에 대응하려면 제품 생산 기업으로 진출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인수 배경을 설명했다.
◆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 구본무 LG그룹 회장, 고 박태준 전 포스코 회장
이헌재 전 부총리는 김대중 정부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을 지내며 반도체 빅딜을 중재했다. 이 전 총리는 구본무 LG그룹 회장에게 반도체 사업을 넘기도록 설득한 결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이 전 부총리는 구 회장과 독대해 “게임을 크게 하시라”며 “마음 정리를 하라”고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는 설득이라기보다 압력에 가까운 것으로, 정부가 그린 빅딜의 그림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실제로 당시 금감위는 LG반도체의 자금줄을 조이며 빅딜을 마무리짓고 있었다.
구 회장 독대 이후 이 전 부총리는 시중 금융기관에 LG반도체에 대한 금융 제재를 지시했고 금융권은 즉시 LG반도체에 신규 대출을 중단했다. 그 즈음 김대중 대통령은 “5대 재벌 중 한 곳이 반도체에 집착하고 있으나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중도에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후 LG는 데이콤 사업을 받아들고 반도체를 현대에 넘겼다.
이 전 부총리는 이후 저서에서 당시 반도체 빅딜에 대해 “회한이 많이 남는다”고 토로했다. 기업 간 거래는 기업에 맡겨야 했다는 것. 이 전 부총리는 평소 “정부 주도의 빅딜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며 반대해 왔지만 “청와대까지 나서자 주무 장관인 나도 `나 몰라라` 하기는 어려웠다”고 회고했다. 이 전 부총리는 1968년 행정고시로 관가에 입문한 정통 관료로, 1974년 1차 석유 파동으로 인한 외환문제 해결에 관여했으나 1979년 율산 사건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대우반도체 대표이사 전무 등의 활동을 거쳐 김대중 정부 초대 금감위원장으로 발탁됐다. 이어 노무현 정부까지 재정경제부 장관 겸 부총리를 지냈다.
한편 이 전 부총리는 당시 `빅딜안`을 처음 제시했던 인물로 고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을 지목하기도 했다. 박 전 명예회장이 고안한 삼각 빅딜은 현대에 자동차, 삼성에 반도체, LG에 석유화학을 몰아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안은 7종 산업 빅딜로 확대됐고, 재벌과 직접 거래하지 않는다던 구조조정 원칙은 지켜지지 않았다.
박 전 명예회장은 지난 1968년 포항종합제철 사장 취임 후 한국의 철강 신화를 새로 써 `철강왕`으로 불렸다. 지난 1981년 민정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뒤 자민련 총재를 지내고 2000년 국무총리가 된다. 타계 전까지 포스코 명예회장을 맡았다.
정미나기자 mina@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