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인생에 자주 비유된다. 361개 점에 흰 돌과 검은 돌을 번갈아 놓는, 단순하고 정적인 게임이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수만 가지 경우의 수가 존재한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승부와 단순함 뒤에 감춰진 복잡한 규칙은 인생 이야기를 다루기에 적격이다. 이미 청년과 직장인의 애환을 바둑판 위에 풀어낸 윤태호 작가의 ‘미생’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다.
최근 극장가에서도 바둑을 소재로 한 영화 ‘신의 한수’가 화제다. 바둑을 복수와 도박(내기)의 드라마로 풀어냈다. ‘타짜’와 겹쳐 신선함이 떨어진다는 평도 있지만 정중동의 바둑을 박진감 넘치는 액션과 버무려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타짜에 기라성 같은 도박 고수들이 등장했다면, 신의 한수에는 다양한 개성의 바둑 고수들이 등장한다. 복수의 독을 품은 전직 프로 바둑 기사, 맹인 기사, 말로 바둑을 두는 ‘촉새’ 기사, 돈만 노리는 비열한 기사 등이 나와 한판 대결을 펼친다.
다음달 19일에는 수학·과학이 바둑 고수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8월 13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세계수학자대회 프로그램으로 ‘수학과 바둑’이 마련됐다. 이병두 세한대 바둑학과 교수가 바둑 속 수학을 설명하고 컴퓨터 바둑 현황을 소개한다.
바둑에서 공격과 방어 패턴을 수리 모델로 분류하고 방정식으로 표현한다. 이를 활용하면 수(手)의 예측도 가능하다. 이 교수는 한국과 중국·일본 프로 바둑 기사의 대국을 수학 계산으로 연구해왔다. 그는 이 같은 수리 모델을 기초로 한 인공지능이 수년 내에 인간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수학자 여섯 명과 프로 기사 한 명이 대국을 벌이는 6대1 다면기 행사도 마련됐다. 유창혁 9단, 이창호 9단, 서봉두 9단, 박지은 9단, 김효정 2단이 참여할 예정이다. 청중 30~40명은 대국장 입장이 가능하다. 유창혁, 이창호, 서봉수 9단의 대국은 컴퓨터 프로그램(사이버 오로)을 통해 대국장 밖으로 중계된다.
외국에서는 이미 슈퍼컴퓨터가 프로 체스 기사를 이긴 전례가 있다. 1997년 IBM 슈퍼컴퓨터 ‘딥 블루’가 체스 세계 챔피언이었던 게리 카스파로프를 2승 1패 3무로 꺾은 것이다. IBM은 1989년부터 체스용 슈퍼컴퓨터를 개발했다. 중국인 과학자 슈펑슝 등이 참여해 딥 블루를 개발했고 1996년 한 차례 패배 이후 성능을 개량해 1년 후 첫 승리를 거뒀다.
당시 딥 블루 처리속도는 1기가플롭스로, 초당 10억회 연산이 가능했다. 예측 시스템은 약 12수 앞을 내다볼 수 있어 인간의 예측 능력(약 10수)을 앞질렀다. IBM은 이후에도 2011년 슈퍼컴 ‘왓슨’을 퀴즈쇼에 출연시키는 등 인간 대 인공지능의 대결을 이어가고 있다.
수학과 컴퓨터 과학에 기반한 인공지능이 바둑에서도 ‘신의 한수’를 둘 수 있을지 주목된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