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식에는 형식이 중요하다. 결혼식은 중국에서는 신랑신부 양가 조상에게 고하는 절차가 포함돼야 하고, 일본에서는 신랑신부가 잔을 아홉 번 돌려가며 마시는 합환주 의식이 있으며, 태국에서는 승려를 결혼식에 초대해 불교의식을 한다. 물론 우리 결혼식은 주례를 모시고 신랑신부 행진을 하는 서양식과 신라시대부터 내려온 폐백과 같은 우리 전통이 섞여 있다.
이렇듯 예식 형식은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그 시대 문화와 역사를 반영해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이다. 요즈음 연예인들을 중심으로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일가친척만 모여서 치르는 작고 아름다운 결혼식이 반향을 일으키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결혼식에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주례사다. 신랑신부를 축하하고 두 사람 인생에 도움이 될 만한 교훈이 되는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틀에 박힌 상투적인 표현보다는 실제로 도움이 될 이야기로 신랑신부 삶에 귀감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 근무하는 이유로 최근에 이러한 축하와 격려 메시지를 담은 축사, 격려사를 각종 세미나, 콘퍼런스, 워크숍, 학술대회 등에서 자주 접하면서 나름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행사 규모가 클수록, 정부기관이나 입법부가 참여해 고위관료와 정치인의 참여가 많을수록 축사와 격려사를 하는 시간에 상대적으로 참석자가 많고 시간도 길어진다. 하지만 축사, 격려사가 끝나면 행사 콘텐츠인 주제발표나 토론회에는 참여하지 않고 할 일을 마친 이른바 VIP께서는 썰물처럼 참석자들과 함께 행사장을 빠져나간다. 이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곳에서 남아 있는 실무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맨 앞 귀빈용 좌석이 텅 비어 있는 행사를 마무리하게 된다. 격려사 내용을 보면 더욱 이상하고 답답하다. ICT 행사는 그 분야 전문성을 어느 정도 이해한 후 보다 손에 잡히는 전략과 비전을 가지고 이야기를 해도 정신없이 변화하는 거대한 기술의 물결을 따라잡기 어렵고 방향성과 영혼 없는 덕담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그러나 막연하고 포괄적으로 참으로 수고와 노고가 많다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표현과 이 분야를 아낌없이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는, 시장 원리와 변화 상황에 이해 없이 던지는 공허한 메시지만 난무한다. 게다가 이러한 연설문은 행사 자료집에 수록되는 일이 별로 없다. 오직 연사 정장 상의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가 언급한 내용 일부가 언론에 키워드로 등장하면 그나마 빛을 보는 것이다.
이러한 연설은 연설자가 참석자를 설득하고자 하는 의지, 발표 내용에의 책임감, 시장과 사회에 대한 리더십은 물론이고 작동시키고자 하는 해당 분야의 구조적 병목구간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원인을 분석해 변화의 방아쇠를 당기고자 하는 영혼 어린 일갈은 기대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행사 주관기관에서 축사, 격려사가 포함된 행사 의전에 쏟는 노력은 참으로 눈물겹다. 어떻게든지 관할하는 정부와 국회 VIP께서 참석하도록 해 이를 기반으로 위세를 과시하고 예산과 지원을 확보하려는 의지는 사전에 준비된 분초 단위 행사진행 매뉴얼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준비와 의전 성공이 과연 행사 본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행사 위세를 과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분야 시장이 자동적으로 반응해 자연스럽게 흥행에 성공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선도적인 R&D 투자가 필요한 분야거나 규제 개선 등 정부와 국회의 변화 의지가 중요한 것이라면 시장에만 기대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시장에 영향을 끼치는 규제자와 입법자들의 참여와 의지의 표명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축사만 하고 빠져나가는 뒷모습에서 시장이 폭발적으로 반응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거의 운에 가까운 기대감이다. 차라리 가장 관심에서 멀어진 발표시간 중간에 카메오로 깜짝 등장을 하는 것이 오히려 시장에 즐거움도 주고 인기 없는 시간에도 정부와 정치인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나머지 행사 전체를 아주 높이 띄워 주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진정 행사장에 필요한 것은 연설문으로 주도되는 정부 추진계획이 아니라 행사 현장에 와서 같이 커피와 김밥을 나눠 먹으며,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하면서 서로를 이해해가고 마침내 각자 이행해야 할 과제를 명확히 인지하고 돌아갈 수 있는 생태계다.
박지원의 양반전에는 강원도 정선 땅의 한 부자 농상인이 양반이 되고자 해 별감 직을 얻고자 양반으로서 지켜야 할 내용이 담긴 이행증서를 읽다가 그 내용이 너무나 과하여 포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결국 양반의 허영을 보고 도저히 납득이 어렵고 이는 옳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해 평생 양반직을 원하지 않게 된다. 지나친 형식은 허영심을 채워줄 수는 있으나 시장을 경험한 농상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로 비칠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허영이란 본래의 것이 드러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이며, 자존심이 부족한 것이라 말했다.
때로는 적당한 허영이 자애로울 수는 있지만 우리는 허영을 누릴 시간도 부족한 기술변화 시기에 직면하고 있다. 하드웨어는 보이는 것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해 허영이 미덕이 될 수도 있다. 하드웨어는 충분히 시장에서 과시되고 어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소프트웨어 생태계에서는 아직 허영심이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수천명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를 채용해 개발을 해도 그 시장의 본질과 생태계를 형성하지 못하면 단기적인 부침만이 있을 뿐이다.
앞으로 ICT 행사에서 막연하고 포괄적이며 덕담만 가득한 축사보다는 연사의 인생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통찰력과 영혼을 느낄 수 있는 위트 있고 감동으로 가슴 저미는 소탈하지만 멋진 쇼 한 편을 보고 싶다. 하물며, 가장 마지막 또는 가장 이른 시간에….
이경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kevinlee@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