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정부가 우리나라 최대 교역국 중국과 자유무역협정(FTA)에 정식 서명했다. 대형 가전, 이차전지, OLED 패널 등 우리나라가 수출 경쟁력을 가진 제품은 중국 자국산업 보호 원칙에 따라 장기 관세 철폐 또는 양허에서 제외됐다. 이에 따라 이차전지 분야 주력인 리튬이온 전지는 우리 제품 수출 때 9.6% 관세를 물어야 하지만 중국산 전지는 무관세로 우리 시장에 들어오게 됐다. 한중 FTA에 따른 글로벌 배터리시장 경쟁구도에서 한국이 처한 상황과 전망을 짚어 봤다.
◇대기업은 현지화로 대비했지만…
한중 FTA로 한국에서 생산한 배터리를 중국에 수출하는 자체가 크게 위축될 전망이다. 향후 5년간 9.6% 관세를 적용받기 때문이다. 5년 이후 관세 철폐가 유력시되지만 기술 평준화로 국산 배터리 경쟁력이 얼마나 유지될지는 미지수다. 배터리는 이미 아시아태평양무역협정에 따라 9.6% 관세가 적용돼 왔다. 이 때문에 한중 FTA로 이뤄진 관세 인하(12%→9.6%) 효과는 사실상 무의미하다.
우리나라 배터리 대기업 삼성SDI, LG화학, SK이노베이션은 일찍부터 중국에 합작법인 형태로 생산거점을 만들었다. 이들 대기업은 중국 배터리업계가 아직 확보하지 못한 중대형 리튬이온 이차전지 기술을 갖고 있어 중국 입성 때 환영까지 받았다. 원소재를 제외한 배터리 완제품만 아니라, 소재나 응용기술까지 글로벌 최고 기술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공급처도 세계 최강이다. 우리나라 대기업은 스마트폰, 디지털기기용 소형배터리뿐 아니라, 현지 유수 글로벌 자동차업체와 전기차용 배터리 공급 라인을 확보했다. 글로벌 배터리 시장 선두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경쟁 중인 일본과 비교해 중국시장 만큼은 확고한 우위를 점할 것으로 예상된다. 배터리 산업은 소재와 생산 원가 1~2%에도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오히려 중국 현지화를 바탕으로 한 시장경쟁력 강화도 노릴 만하다.
물론 기술유출에 따른 우려가 따른다. 대기업 신설 공장은 중대형 이차전지 핵심인 셀 기술부터 패키징 등 일괄 공정 체제를 구축했다. 일부 대기업은 단계적으로 셀 기술까지 현지에 이전한다는 조항까지 계약에 넣었다. 한국과 일본만 보유한 중대형 리튬이온 배터리기술이 중국으로 급속히 이전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한 배터리 대기업 관계자는 “중국으로 배터리 셀 기술이 넘어가는 것은 우리로선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연한 수순”이라며 “중국이 중대형 이차전지 셀 기술까지 확보하게 되면 풍부한 원료를 무기 삼아 가격 면에서 한국을 추월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수년 내 기술 평준화로 지금의 셀 기술이 더 이상 핵심 경쟁력 가치를 상실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핵심 소재·중소 제조기업은 ‘울상’
배터리 제조·생산 설비 중소기업과 이차전지 소재기업엔 빨간불이 켜졌다. 전지 핵심 4대 소재(음극재·양극재·분리막·전해액)뿐 아니라 이차전지 생산에 필요한 전후 공정 장비업체 모두가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우리나라 소재·관련 장비기업은 삼성SDI, LG화학, SK이노베이션 의존도가 90%를 넘는다. 이 때문에 대기업을 따라 중국으로 공장을 이전해야 안정된 공급물량을 확보할 수 있다. 더구나 대기업이 한국에 생산 공장을 증설할 계획을 갖지 않고 있어 내수시장만 바라볼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배터리 장비 업체 피앤티가 지난해 6월 중국 시안에 공장 설립을 결정한 데 이어, 최근 씨아이에스와 피앤이솔루션이 각각 선전과 베이징 등에 공장 설립을 추진한다. 한국 대기업과 공급관계를 유지하려는 목적에서다.
하지만 소재기업은 신중한 상황이다. 자금력이 여유롭지 않은데다, 중국 원소재 가격경쟁력을 능가할 안정적인 수요 확보가 어렵기 때문이다. 양극재 업체 에코프로 관계자는 “우리나라 기업 중대형 배터리 소재 기술은 아직 중국에 비해 경쟁력이 충분하지만 장기적으로 중국에 진출할 수밖에 없다”며 “중국 기업에 비해 대용량 소재기술을 확보했지만 중국에 진출한다면 공급처 확보나 기술 유출에 자유로울 수 없다”고 말했다.
사업 연속성을 위해 중국시장 진출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자금력뿐 아니라 공급처 확보, 기술보호 등 이중삼중 대책이 먼저 요구되는 상황이다.
이차전지 소재나 장비업체뿐 아니라 중소 배터리 업체는 더욱 심각하다. 코캄, 탑전지 등 리튬이온 이차전지 완제품 개발 생산이 가능한 중소 배터리 업체는 중국 시장 장벽이 오히려 높아졌다. 중소기업 자금 특성상 중국 공장 이전이 쉽지 않은데다, 5년 후 관세가 철폐되더라도 중국 시장 진출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어렵사리 이차전지 완제품 기술력을 갖췄지만 기술 평준화로 중국시장 경쟁력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한중 FTA로 대기업과 달리 배터리 중소기업의 중국 시장경쟁력은 크게 악화될 수밖에 없다”며 “중국시장을 우선순위에서 두지 않거나 대기업이 할 수 없는 특수용 배터리 시장을 공략하는 게 살아남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했다.
◇기술 주도권 중국으로 넘어가나
한중 FTA로 중국은 전기차나 에너지저장장치(ESS) 산업에서 다양한 중대형 배터리를 자국 영토 안으로 끌어들인 게 가장 큰 수확으로 꼽힌다. 중국은 이 분야 세계 최대 시장임에도 중대형 배터리 기술이 뒤처져 있었다. 유일하게 리튬인산철 배터리를 탑재한 탓에 뛰어난 가격 경쟁력에도 불구하고 중국산 전기차 해외 수출은 극히 드물었다. 배터리 특성상 양극재를 인산철로 쓰기 때문에 부피와 무게에서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최근 들어 LG화학, 삼성SDI, SK이노베이션 리튬이온 이차전지를 탑재하는 중국산 전기차가 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반면에 중국 리튬인산철 배터리 우리나라 유입은 크게 늘어날 전망이다. 2013년 중국 4대 배터리 업체인 력신이 한국에 진출한 데 이어 위나동방도 한국에 대규모 리튬인산철 공장 설립을 추진 중이다. 무게와 부피는 리튬이온 배터리보다 떨어지지만 가격과 안전성에서 검증된 장점을 앞세웠다. 리튬이온 전지 위주 우리나라 중대형 배터리시장에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중국산 소형전지 한국 유입도 역시 걱정거리다. 중국 소형 배터리는 중대형과 달리 막강한 기술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중국 ATL은 리튬인산철이 아닌 리튬이온 기술로 이미 10년 가까이 애플 아이폰에 최대 배터리 공급사로 선두자리를 확고히 유지하고 있다. 한국 스마트폰, 전자제품뿐 아니라 전기자전거, 전동기구, 골프 카트 등에도 중국 ATL과 력신, BYD 배터리 사용이 늘고 있다.
한 ESS 업체 관계자는 “중국 중대형 배터리 기술 경쟁력은 다소 취약하지만 소형 배터리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 기술을 발휘하고 있다”며 “소형 배터리가 무관세로 유입됨에 따라 한국 세트업체의 중국산 배터리 활용은 점차 늘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태준기자 gaiu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