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퍼블리시티권(인격표지권)’을 인정하는 법안을 발의하자 영화사와 방송사 등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인격표지권은 배우나 가수, 스포츠인 등 유명인이 자신 이름이나 얼굴, 목소리 등 특징을 상품이나 서비스 선전에 이용하는 것을 허락하는 권리다.
5일 국회와 업계에 따르면 길정우 의원이 올해 초 발의한 ‘인격표지권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안’이 오는 9월 정기국회에 상정을 앞두고 있다. 최근에는 대통령소속 국가지식재산위원회가 나서 각계 의견을 모았다. 연예기획사와 방송사·영화사 등 이해관계자 의견을 모으는 절차다.
길 의원이 발의한 법률안은 최근 연예인과 스포츠인 등 유명인 이름과 얼굴, 목소리 등 개인 특징을 상업적으로 사용하는 산업이 늘면서 이를 재산권으로 보호해 주자는 것이 취지다. 미국이나 독일 등에선 광범위하게 보호받는 권리다. 그간에 우리 법률은 대법원 판례조차 인격표지권 인정을 놓고 들쑥날쑥했다. 이를 특별법으로 정해 보호를 명확히 하자는 것이다. 여기에 최근 인격권자 허락 없는 한류 연예인을 내세운 마케팅이 불거지면서 해외 보호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유명인을 대거 확보한 연예기획사로서는 유명인 특징을 재산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셈이다. 한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인격표지권이 제대로 보호되면 연예인 권리 보호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연예인을 활용한 다양한 사업을 벌일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에 영화와 방송사, 제작사 등은 길 의원이 제시한 인격표지권 신설에 강하게 반발했다.
표현의 자유를 헤치고 제작비 증가로 영화제작이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가장 강하게 반발하는 쪽은 영화 업계다. 길 의원이 제시한 인격표지권이 너무 광범위한 것을 이유로 지목했다.
배장수 영화제작자협회 상임이사는 만약 길 의원이 발의한 법률안이 그대로 통과되면 ‘연평해전’ ‘도가니’ ‘변호사’ 등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는 나올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배 이사는 법률안에 따르면 ‘연평해전’에 실명이 나오는 사람에게 일일이 동의를 구하고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해야 해 영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해진다고 전했다. 여기에 상속권까지 부여하면 출판·방송·영화·인터넷 등 전 영역에 걸쳐 파장이 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법률안상 인격표지권은 상속·양도 가능하고 30년까지 보호받을 수 있다. 그는 모든 실화영화 제작에 유가족 동의를 구해야 하는 데 이는 사실상 실화 영화를 만들지 말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반발했다.
배 이사는 “대부분 영화가 흑백 양자 대립 관계를 설정하는 데 흑의 입장에 선 사람이 허락해주겠냐”며 “‘도가니’ 같은 사회 고발 영화는 물론이고 소설도 나올 수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영화제작자협회는 법률안을 면밀히 검토해 대응에 나설 방침이다.
케이블TV방송협회도 법안에 반대를 표명했다. 개인 권리 존중이 중요하지만 산업적 파장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수현 케이블TV방송협회 변호사는 “유명인이 가진 특징을 재산권으로 인정함으로써 부가가치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표현의 자유 침해와 제작비 증가로 인해 콘텐츠 제작 자체를 위축할 수 있어 산업적 피해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행 법률 수정만으로 보호가 가능하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이 변호사는 “인격표지권 보호 절차가 법안 신설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며 “현재도 인격권이나 부정경쟁방지법으로 인격표지권이 보호될 수 있는 만큼 법안 신설보다 기존 법률을 보완해 혼란을 막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인격권을 다룬 민법이나 상법에 규정한 부정경쟁방지법으로도 충분히 인격표지권 보호가 가능하다는 지적이다. 지난 4월에는 박창식 의원이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안을 발의해 인격표지권 보호를 담았다.
<■‘인격표지권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 내용>
이경민기자 km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