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영국 런던에 사는 청소년 알렉스는 친구들과 밤거리를 배회하는 ‘문제아’다. 마약이 함유된 우유를 마시고는 밤거리에서 만나는 사람을 이유 없이 구타하고 푼돈을 빼앗는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고’를 저지르고 달아났는데, 친구의 배신으로 감화원에 잡혀들어간다. 그런데 이곳이 보통 감화원이 아니다. 정부의 특별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곳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루도비코 갱생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우선 알렉스에게 약물을 주입한다. 또 범죄현장을 보여주고 그때마다 지독한 고통을 가한다. 이제 파블로프의 개처럼 오랫동안 이 프로그램을 이수한 알렉스는 범죄를 생각하기만 해도 극심한 고통에 빠진다. 정부 관계자는 알렉스를 매우 ‘과학적’으로 교화하는 데 성공했다며 기뻐한다.
프로그램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알렉스는 14년형에서 크게 감형받고 일찍 출소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알렉스는 자신의 방을 이미 세입자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부모도 자신이 돌아오지 않을 것으로 알고 사는 것을 보게 된다.
집에 들어가지 못한 그는 바깥을 떠돌게 되고, 자신이 폭력을 가한 사람을 차례로 마주치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복수를 당한다. 이 과정에서 알렉스는 욕망과 감정을 극도로 통제받는 무기력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이 1971년 제작한 이 영화는 1962년 앤서니 버지스가 영국에서 출간한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소설과 영화 결말이 약간 다른 점은 있지만 두 작품이 ‘국가에 의한 폭력적 세뇌’와 ‘자유의지 없는 도덕’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같다.
영화에서 교도소 소속 목사는 ‘강제된 선의’에 의문을 제기한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가 이미 제거된 사람이 진정한 사람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선택한 선의가 아닌 외부로부터 강제된 선의는 진정한 선의가 아니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더욱이 영화에서와 같이 재소자에게 극도의 고통을 주는 방식의 교화장치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국가폭력’임을 암시한다.
이 같은 자유의지 옹호라는 주제의식 덕분에 원작은 조지 오웰, 올더스 헉슬리 등 ‘디스토피아’ 소설 계보를 잇는 것으로 높이 평가됐다. 우리나라에서 이 같은 문제의식이 큰 호응을 받을 수 있을 지에는 의문부호가 그려진다.
우리나라는 개인 자유보다 국가 전체 안전과 체제유지라는 목표를 더 크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남북 분단이 가져온 시대적 한계가 가장 크게 작용하는 듯하다. 약간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약물을 주입해 성범죄자 성욕을 국가가 제거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봄직하다.
국가가 강제적으로 한 개인을 도덕적으로 만든다는 점에서는 시계태엽 오렌지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먼 미래에 인간 자유의지를 완전히 조종할 수 있는 기술이 등장해 ‘범죄를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질 때를 대비한 ‘예행연습’이 될 수도 있다.
김용주기자 kyj@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