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컴퓨팅 업체 델이 정보기술(IT)기업 인수 사상 최고 금액인 670억달러(약 76조6000억원)에 세계 1위 스토리지 기업 EMC를 인수한 것은 기업용 IT 시장에서 시너지에 큰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델은 세계 서버 시장 2위, 네트워크 분야 3위 업체다. 하지만 스토리지 분야에서는 세계 5위에 머무른다. EMC는 스토리지 시장에서 세계 1위지만 서버, 네트워크가 없다.
기업용 IT, 즉 엔터프라이즈 시장에서 핵심 인프라는 크게 서버·스토리지·네트워크 장비가 꼽힌다. 양사 합병은 이런 서로의 약점을 단숨에 보완하는 것이다.
또 최근 인프라 추세는 서버·스토리지·네트워크 장비가 하나로 합쳐진 통합 장비(어플라이언스) 형태다. 델과 EMC가 합치면 이 분야 대응력도 강화할 수 있다.
여기에 가상화 분야 선두 ‘VM웨어’, 빅데이터 솔루션 업체 ‘피보탈’, 보안 ‘RSA’를 모두 끌어안으면서 빅데이터·클라우드·소프트웨어정의데이터센터와 같이 소프트웨어(SW) 경쟁력이 필수인 차세대 IT 시장에 대비하는 포트폴리오를 완성할 수 있게 됐다.
에릭 존슨 밴더빌트대 오웬 경영대학원 총장은 “델이나 EMC가 혼자 사업을 한다면 계속 성장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양사는 정말 서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델과 EMC 역시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마이클 델 델 최고경영자(CEO)는 “델과 EMC가 합병하면 SW에 기반을 둔 데이터센터, 하이브리드 클라우드, 모바일 등 차세대 IT 전략 분야에서 큰 발전을 이룰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 투치 EMC 회장도 “EMC 역사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날”이라며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기 위해, 더 성장하기 위해 역사적인 전환을 하겠다”고 말했다.
델과 EMC는 내년 5~10월 사이 합병을 마무리지을 계획이다. 구체적 실적이 공개되지 않았지만 EMC와의 합병 법인 매출은 약 800억달러(약 91조7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경쟁사를 위협하는 규모다. 다음 달 1일부로 HP는 엔터프라이즈 부문과 PC 부문이 별도 분리한다. 서버·스토리지 등을 판매하는 HP엔터프라이즈는 지난해 매출 551억달러를 기록했다. HP와 경쟁해온 델이 세계 최대 스토리지 업체인 EMC를 손에 넣으면서 HP는 상당한 부담을 안게 될 전망이다. HP 스토리지 사업 자체도 타격을 입을 가능성 있다. 서버와 스토리지 협공으로 HP 핵심 사업인 서버도 흔들릴 수 있다. 기업 고객이 IT 인프라를 구축할 때 서버, 스토리지, 네트워크를 개별적으로 사지 않고 한꺼번에 구매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델과 EMC 합병은 상호보완적이란 평가가 대부분이다. 반면에 장밋빛 전망만 기대하기 힘들다는 분석도 나온다. 바로 클라우드 때문이다.
클라우드는 사용자에 필요한 하드웨어나 SW를 인터넷으로 필요한 만큼 빌려 쓰는 서비스다. 인프라를 직접 구축할 필요가 없다. 이 때문에 클라우드가 확산될수록 HP나 델·EMC와 같은 기업은 제품 판매 기회를 놓치게 된다.
실제로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들은 고속 성장 중인 반면에 전통 엔터프라이즈 기업은 성장세가 예전만 못하다. 세계 최대 클라우드 서비스 업체인 아마존은 지난 2분기 18억달러 매출을 기록했다. 작년 동기보다 무려 81% 증가한 수치다.
아마존 클라우드 사업을 총괄하는 앤디 재시 수석 부사장은 “최근 대형 IT 기업 성장세가 주춤한 것과 달리 우리는 고속 성장 중”이라며 “아마존 클라우드는 이제 연간 70억달러 규모 사업이 됐다”고 말했다.
반면에 서버·스토리지·네트워크 장비와 같은 하드웨어 수익성은 점점 떨어진다. EMC는 지난 1월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구조조정을 단행하기도 했다. 또 지난 5년 동안 EMC 주식은 20~30달러에 머물렀다. 경쟁이 심화하고 IT 환경이 급변하면서 올해 들어 주가가 13% 떨어지자 주주들의 주가부양 압박을 받았고 결국 회사 매각에 이르렀다는 분석도 있다.
전문가들은 델과 EMC 통합 법인 경쟁사로 HP, 오라클, IBM과 같은 전통 하드웨어 기업이 아닌 아마존, MS, 구글로 대표되는 클라우드 서비스 업계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에릭 고든 미시간대학 비즈니스 스쿨 교수는 “IT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는 전문 IT인력이 엄청나게 늘었고 많은 것이 표준화되고 있다”며 “클라우드 생태계에서는 결코 한 회사 것을 고집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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