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 수확의 계절이다.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는 기관장이 있다. 김주하 NH농협은행장이다.
1981년 행원으로 입사해 30년 넘게 농협인으로서 외길을 걸어왔다.
농협은 농민을 위한 공적기관으로 출발했지만 최근 새로운 변화의 길을 걷고 있다. 많은 IT기업에 농협 재산인 응용프로그램개발환경(API)을 무상으로 공개하고 국내 최대 규모 핀테크 혁신센터도 건립했다. 돈을 벌기 위한 경영보다는 돈을 쓰더라도 같이 상생하는 길을 찾기 위해서다. 국내 핀테크 생태계와 국내 금융산업 발전을 위한 씨를 뿌리고 있는 셈이다.
김주하 행장은 자신이 핀테크 전문가는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핀테크는 ‘어깨동무’와 동의어라며 농협 핀테크 전략에 담긴 의미를 풀어냈다.
그런 그가 어느새 농협은행장으로 임기를 채웠다. 만 34년 동안 자신이 농협에서 한 일이라곤 현장에서 희로애락을 같이했다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현장 경영의 덕장, 김주하 행장을 만추 기운이 가득한 서대문 본관에서 만났다.
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
-행장 취임 후 농협은행 실적이 상당히 좋다. 비결이 있는가.
▲회사 경영을 한사람이 하는 건 아니다. 농협은행은 족보로 따지면 국내 모든 은행의 시작이기도 하다. 1906년 출발해 농민을 대변하는 금융기관으로 성장해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시장 친화적이지 못했다는 반성을 한다. 취임 후 농협 경영을 시장 친화적으로 바꾸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시중 은행이 IMF를 겪으면서 여러 곳이 합쳐진 조직이라면 농협은 독자 생존한 저력이 있다. 그 저력에 바탕을 두고 직원 생산성을 높이며 보다 시장에 친밀한 기관으로 거듭나고자 노력한 결과다.
-금융사 자산으로 불리는 API를 무상으로 개방했다. 쉽지 않은 결정인데 왜 그런 결단을 내렸나.
▲사실 왜 아깝지 않았겠나(허허). 하지만 그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 핀테크 시대에는 은행이 독자생존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IT기업과 동반해서 국민에게 편리성을 제공하는 상생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금융사가 먼저 나서야 한다. NH핀테크 혁신센터를 개소한 것도 동반 상생을 위함이다.
금융과 IT 융·복합은 이제 새로운 기회이자 위협요인이 될 수 있다. 금융 API를 오픈해 외연을 넓히는 것이 맞다고 본다. 애플과 구글은 앱 마켓을 개방해 사업 확장과 생태계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농협도 API를 오픈함으로써 핀테크 기업을 끌어안아 동반성장하겠다.
-농협하면 서민기관, 농업인을 위한 기관으로 인식된다. 언뜻 농협이 핀테크 사업에 적극 나서는 게 어색하다는 여론도 있다.
▲기준금리는 계속 떨어지고 예대 마진으로 은행이 연명하는 시대는 지났다. 수익 다변화가 이제 생존이 된 것이다. 농협도 예외일 수 없다. 과거 2003년 이후 국내 경기가 좋던 시절 많은 은행이 부동산 사모투자펀드(PEF)와 기업 여신을 대폭 늘리면서 돈을 대거 풀었다. 결과는 어땠나. 다 넘어졌다. 이전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농협이 수익만을 쫓기 위해 핀테크 사업을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핀테크에 내재된 참 의미는 바로 서민금융이다. ‘고객이 머무는 곳에 금융서비스가 존재하는 것.’ 이것이 농협이 생각하는 핀테크다. 과거 금융기관이 획일적으로 제공했던 금융서비스는 한계가 있다. 다양한 국민 생활 접점에서 보다 편리하고 익숙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급자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지난 19일 금융권 최대 규모 NH핀테크 혁신센터를 구축했다. 센터 구축 이유와 활용방안은.
▲NH핀테크 혁신센터는 금융권 최대 규모로 전용면적 약 470㎡(141평)에 달한다. 핀테크 기업과 농협이 협력, 상생하는 열려 있는 공간이다. 협력 기업에 모든 서비스를 지원한다. 핀테크 기업은 혁신센터 사무 공간, 테스트 랩 등 다양한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고 세미나실에서 열리는 정기 강연과 교육 혜택도 받을 수 있다.
신설된 테스트 랩은 기업 개발환경 및 금융 API 테스트 환경을 클라우드 방식으로 지원한다. 입주기업에 일정기간 무상 제공한다.
핀테크 기업을 종합 지원하고자 유관 특허 전문기업에서 맞춤형 특허 컨설팅을 제공하고 특허지원을 활용한 라이선싱을 지원한다. 혁신센터는 농협은행뿐만 아니라 범농협 금융그룹이 공동 참여하는 소통 창구로 활용될 것이다. 상호금융과 은행, 증권, 보험 등 금융 차원에서 각 조직 핵심 사업 역량 인프라를 핀테크 사업에 집중하면 상당한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민감한 질문 하나 드리겠다. 농협은 보안사고 기관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행장으로서 어떠한 보안 강화대책을 강구했나.
▲올해는 농협은행이 출범한 지 4년차다. 과거를 돌아보면 농협은 중앙회 산하 신용사업국 밑에 시스템이 같이 묶여 있었다. 은행 IT뿐만 아니라 회원조합, 경제사업 시스템이 맞물려 돌아갔다. 이는 타 은행 대비 다섯 배 이상 전산 용량이 필요했다. 비용도 많이 들어가고 위험도 그만큼 높았다. 상대적으로 IT인프라 투자가 약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작년부터 독자 시스템을 가동하고 보안 투자를 갑절 이상 늘렸다. 그 결과 올해 3분기 기준 전자금융 사고는 단 네 건에 그쳤다. 피해금액은 2000만여원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건수는 94%, 금액은 97% 감소했다. 이상금융거래탐지시스템(FDS) 고도화 작업과 안심보안카드, 대포통장 근절 등 지속가능한 보안 강화 작업을 펼쳤다. 대포통장을 근절하고자 금융거래 목적 확인을 강화하고 모니터링 업무를 개선했다. 그 결과 전 금융기관 중 농협 대포통장 점유비율이 10월 말 현재 최저 수준인 2.9%로 떨어지는 성과를 거뒀다.
농협 직원 수첩에는 보안 수칙 10계명이 적혀 있다. 항상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보안 강화를 생활화했다.
-현장경영이 모토인 걸로 알고 있다. 전국을 밤낮 없이 돌아다니는 경영으로 유명하던데.
▲1981년 농협에 입사했다. 행장에 오르기까지 박사학위도 하나 없다. 만 34년 동안 은행 업무에만 집중했다. 현장과 동떨어진 최고경영자(CEO)는 있을 수 없다. 현장 목소리를 그대로 경영에 반영했다고 자신한다.
금융은 사람 장사다. 단순히 돈을 세고 버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사람에서 가치와 행복을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장 소통은 그 이음새다. 현장에는 금융 서비스가 필요한 고객이 있다. 나는 현장 목소리로 금융 트렌드를 읽는다. 직원과의 만남도 늘 설렌다. 우리 직원들이 다양한 아이디어와 고충을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경영인이 되는 게 목표다.
-벌써 2015년도 막바지다. 올해 중점 사업은.
▲지난 3년간 농협은행은 안정적인 정착을 위한 착근(着根) 과정을 거쳤다면 올해는 가지를 뻗고 잎을 무성하게 키워 풍성한 과실을 맺을 준비를 해야 한다. 올해 경영목표를 ‘신뢰와 혁신을 통한 내실경영 기반’ 구축으로 정했다. 경영화두로 끊임없이 수익 재원을 개발하고 불요불급한 지출을 줄인다는 의미의 ‘개원절류(開源節流)’를 제시했다.
수익 발굴인 ‘개원’은 저원가성 예금과 우량 여신 유치를 확대하는 등 이자 이익을 극대화하는 한편 방카슈랑스, 수익증권, 신탁, 퇴직연금, 외국환 등 수수료 사업을 중점 추진했다.
비용 절감인 ‘절류’는 고객 상시방문(C/L) 시행 등 사전적 건전성 관리로 충당금을 감축하고, 각종 세금이나 출연료도 누수가 없는지 꼼꼼히 점검했다. 아울러 스마트금융센터와 핀테크 오픈플랫폼 구축 등 급변하는 금융환경에 대응했다. 글로벌화를 위해 중국사무소와 베트남 사무소 지점 전환 등 해외진출 확대도 적극 추진하고 있다. 그 결과 지난 10월 말 기준 농협은행 당기순이익은 5320억원이다. 작년 동기 대비 49.1% 증가했다.
-마지막으로 외길을 걸어온 농협인의 한 명으로, 향후 농협이 어떤 기관으로 거듭나야 할지 제언한다면.
▲핀테크 사업을 포함한 농협 모토는 명확하다. 핀테크를 우리말로 풀어 쓰라면 ‘어깨동무’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이 보유한 IT인프라를 활용해 금융기관과 기업이 어깨동무하는 핀테크 환경 구축에 앞장서겠다. 아울러 농업, 농촌의 수익 센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자 시장경쟁력 확보에 중점을 두겠다. 가장 실력 있는 은행으로 거듭나는 데 일조하겠다. 내년도 경영목표를 ‘질적 성장과 역량 강화를 통한 시장경쟁력 제고’로 정한 것도 이런 의지를 담았다.
올해는 핀테크 산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한 해를 보냈다. 하지만 핀테크 산업은 지급결제 분야에 편중돼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자산관리, 빅데이터 분석, P2P 대출 등 다양한 분야 핀테크 기업이 성장해 생태계를 만들고, 나아가 우리나라 경제에 창조적 파괴를 가져올 수 있는 원동력이 돼야 한다. 농협도 그 파트너로서 최선을 다하겠다.
대담=김동석 전자신문 부국장
정리=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
사진=박지호기자 jihopress@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