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업은 `대기업` 문턱에 들어서는 순간 성장 발판을 빼앗기고 있다. 정부 지원이 끊기는 것은 물론이고 정상 기업 활동마저 제한된다. 대기업집단 지정 근거인 공정거래법상 규제뿐만 아니라 많은 법률에서 이를 자의적으로 차용하며 규제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일률적 잣대가 아닌 각 법률 특성을 반영한 대기업집단 적용 기준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25일 업계에 따르면 정부의 대기업집단 지정에 따른 규제가 기업 성장을 크게 저해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근 새롭게 대기업집단으로 편입된 카카오, 셀트리온, 하림 등이 “대기업규제가 기업 성장 발목을 잡는다”며 정부에 개선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날 한국경제연구원이 개최한 특별좌담회에서 홍은택 카카오 수석부사장은 “대기업집단 지정으로 새로 적용받는 규제만 76개”라며 “글로벌 대기업은 수백조 자산 규모와 자본력으로 세계 시장을 발 빠르게 장악하고 있지만 국내 정보기술(IT) 기업은 과거 제조업 위주 규제 방식을 그대로 적용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형기 셀트리온 대표도 “우리 바이오시밀러 업체는 글로벌 기업보다 규모가 작음에도 대기업규제를 적용 받으며 이들과 경쟁해야 한다”며 “사업상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규제 문제가 불거진 것은 올해 대기업집단 지정 기업이 종전 재벌기업과 태생·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제조업 중심 재벌기업의 부정적 이미지가 없고, 친인척을 동원한 계열사 부당 지원 등 구태가 없는 젊은 기업이다. 이들도 기존 재벌기업과 같은 규제를 적용하는 게 맞느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자산총액 5조원 이상`인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을 상향 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은 2008년 2조원에서 5조원으로 확대된 후 8년째 변동이 없다. 반면 국내총생산(GDP)은 2008년 1104조원에서 8년 만에 1531조원으로 427조원(38.7%) 늘었다. 공정위도 상향 조정 필요성에 공감하고 대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정작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것은 공정거래법이 아닌 공정위 대기업집단 기준을 그대로 갖다 쓰는 다른 법률이다. 공정거래법상 대기업집단을 지정하는 이유와 다른 법에서 대기업집단 활동을 제약하는 이유가 확연히 다름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법률 특성을 반영한 대기업집단 지정 기준이 필요한 이유다.
공정위 대기업집단 기준을 이용하는 대표 법률은 △중소기업기본법 △중소기업창업지원법 △소상공인 보호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상속세 및 증여세법 △중견기업 성장촉진 및 경쟁력 강화에 관한 특별법 △해외진출기업의 국내 복귀 지원에 관한 법률 등 수십가지다.
예컨대 카카오가 우려하는 `스타트업 기업의 투자 유치 제한`은 중소기업창업지원법상 제약이다. 법상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는 대기업집단에 속하는 회사 투자가 금지된다. 카카오나 자회사 케이벤처그룹이 보유한 스타트업, 벤처는 창투사 투자를 유치할 수 없다.
홍은택 카카오 수석부사장은 “카카오 계열사로 편입되면 아무리 작은 기업이라도 대기업집단 규제를 받는다”며 “기업 활동에 제약이 생긴다고 판단하면 카카오와 인수합병(M&A)을 부담스러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형기 셀트리온 대표는 “대기업집단 문턱을 넘어서며 당장 정부 연구개발(R&D) 세제지원 혜택도 대폭 줄어든다”며 “개별 기업 규모와 상관없이 모두 규제대상이 되기 때문에 신속한 외부 자금조달 제한 등이 우려된다”고 토로했다.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 김명희 기업/정책 전문기자 noprint@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