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소프트웨어(SW) 기업 SAP의 전방위 `저작권 사냥`에 국내 대기업이 무더기로 걸려드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SAP는 SW 라이선스 초과 사용을 주장하며 기업당 최대 2000억원 지불을 요구했다. LG화학, LG유플러스, 코웨이, GS칼텍스, 현대중공업은 이미 거액의 합의금을 지급한 것으로 확인됐다.
법률 전문가들은 SAP의 공정거래법 위반 가능성을 제기했다. 계약을 지나치게 자사에 유리하게 해석했다는 것이다. 기업들도 공정거래위원회 신고를 검토했지만 불확실한 승소 여부, 신고 시 여론화 부담에 주저하고 있다. 공정위는 “신고가 없어도 사회문제로 판단되면 직권조사도 가능하다”고 밝혔다.
13일 업계에 따르면 SAP는 지난해부터 국내 주요 대기업에 전사자원관리(ERP) SW 저작권 문제를 집중 제기했다. 계약상 약속한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SW를 사용했다는 주장이다. SAP는 한국 ERP 시장의 1위 사업자로 2014년 기준 시장점유율은 39.5%다.
SAP는 각 기업 감사(audit)를 거쳐 ERP를 초과 사용했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초과 사용 규모에 따라 각 기업에 무려 2000억원까지 라이선스 추가 구매를 요구했다.
SAP의 문제 제기로 라이선스를 추가 구매한 기업은 본지가 확인한 것만 LG화학, LG유플러스, 코웨이, GS칼텍스, 현대중공업 등 5개사다. 추가 구매금액은 LG화학 130억원, LG유플러스 30억원, 현대중공업 40억원, GS칼텍스 80억원, 코웨이 80억원이다.
업계는 이들 외에도 국내 대기업 상당수가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고 말한다. 최근 불거진 SAP와 한국전력공사 간 국제분쟁조정 사태도 동일하다.
익명을 요구한 기업 관계자는 “SAP가 공문을 보내 거액의 추가 라이선스 구매를 요구했고, 결국 양사 합의로 사태가 마무리되는 상황”이라면서 “상당히 많은 대기업이 이 문제에 걸려 있다”고 말했다.
SAP가 문제 삼는 부분은 `간접사용`(Indirect Access)과 `다중접속`(Multi-Logon, 하나의 ID를 여러 사람이 사용)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핵심은 다른 시스템을 통해 ERP 데이터를 이용하는 간접사용 문제다.
SAP는 계약상 간접사용은 허용하지 않았는데 해당 기업이 이를 지키지 않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하고 해당 기업은 울며 겨자 먹기로 통합 라이선스 `싱글 매트릭스`를 추가 구매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이미 해외에서는 간접사용을 근거로 한 추가 라이선스 구매 요구가 `SAP의 새로운 사업 모델`이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대기업들은 로펌 등을 통해 대응 방안을 모색했다. 로펌들은 SAP가 라이선스 `사용`의 범위를 자사에 유리하게 확대 해석, 공정거래법 위반 소지가 높다고 분석했다. 그럼에도 기업들은 결국 공정위 신고를 포기하고 합의로 사태를 마무리 짓고 있다. 승소 여부의 불확실성과 여론화 부담, SAP의 ERP를 타사 제품으로 교체할 때 비용 부담이 크다는 이유다.
공정거래법에 정통한 변호사는 “여론화가 부담스럽고, 승소가 불확실한 소송전에 나서기보다 차라리 합의금을 내는 게 경제성이 있다는 판단 때문”이라면서 “아무도 먼저 나서지 않으려 하고 사회 파장도 큰 만큼 공정위가 직권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신고가 있다면 당연히 검토하지만 직권조사는 행위의 심각성, 시장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결정한다”면서 “사안이 이슈화되고 혐의가 도드라지면 직권조사에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SAP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 것이며, 공정거래법 위반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SAP코리아 관계자는 “한국, 중국 등 시스템통합(SI) 기업이 존재하는 몇몇 국가에서 ERP 데이터를 끌어 쓰는 등의 `간접사용`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면서 “시각차 때문에 불만이 제기될 수 있지만 계약 시 이미 이런 부분에 서로 동의한 것이기 때문에 법 위반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SAP와 국내 대기업 간 합의 규모 및 분쟁 요지(자료:업계 종합)>
유선일 경제정책 기자 ysi@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