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노벨상 시즌만 되면 우리 기초과학 지원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지난해 일본이 3년 연속 노벨과학상을 수상하면서 우리 기초과학 정책에 비판 수위는 더 높아졌다. 노벨상 발표 직전에는 국내외 과학자 약 1500명이 연구자 주도의 상향식 기초연구 지원 확대를 요구하는 청원을 내기도 했다.
성장과 분배 또는 개발과 환경 보전과 같은 주제와는 달리 기초과학 지원은 정권의 이념이나 우리 경제 여건과 무관하게 항상 강조돼왔다. 2008년 경제위기 이후 대부분 선진국에서는 R&D 지원이 정체되거나 감소했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경제성장률을 훨씬 넘는 지원 증가가 이뤄졌고 특히 응용이나 개발연구보다 기초연구비 증가폭이 더 컸다. 그런데 왜 우리 기초과학 체력에 대한 우려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가고 연구자들이 직접 청원에 나서기까지 했을까. 여기에는 기초과학과 기초연구의 개념 차이와 이로 인한 통계 착시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 기초과학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뭔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과학연구에는 기초와 응용개발의 구분만큼이나 하향식(Top-down)과 상향식(Bottom-up) 연구의 구분도 무의미하다. 정부가 기획한 프로그램 구체성에 따라 구분이 명확치 않거나 동일 사업 내에도 혼재하며 무엇보다 실제 대학 연구실에서 두 연구 수행방식 차이는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순히 기초연구 지원을 늘려야 한다거나 하향식보다는 상향식 연구의 비중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에 앞서 기초과학에 대한 우리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초과학 토대인 순수한 호기심이 `문명의 표시`라는 믿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며 과학기술의 경제적 기여와 기초과학의 사회적 책임성에 대한 요구는 오늘날 거스를 수 없는 추세다. 그럼에도 연구자들의 자율에 기반으로 한 기초과학 지원 필요성이 꾸준히 강조되는 것은 바로 자율이 창의성의 핵심 조건이기 때문이다. 사실 연구주제나 방법론의 선택, 부정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연구비의 자율적 사용, 연구결과의 자유로운 발표 등 일반적인 연구의 자율에 대해 정부와 연구자의 시각 차이는 크지 않다.
그러나 주어진 재량을 활용해 추구하는 목표의 차이가 연구 책임의 차이를 만들고 이러한 차이가 자율과 책임의 딜레마를 낳는다. 정부는 R&D 지원에서 `경제적 책임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정부가 생각하는 연구의 자율이란 이를 달성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자 배려다. 따라서 단기적인 성과가 가시화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책임성`이라는 무기를 꺼낸다. 이는 기초과학에 대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반면에 연구자들은 본질적 속성에 의해 진리 추구라는 전문가로서의 책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외부로부터 부여된 연구의 책임성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 고려한다. 연구자들은 항상 더 많은 재원과 더 높은 수준의 자율을 원하며 충실한 저변이 훗날 더 큰 가치를 낳을 것이라 주장하지만 정부는 지나치게 높은 연구의 자율성이 책임성을 소홀하게 할 것을 우려한다.
중요한 것은 자율의 과다가 아니라 정부와 연구자가 생각하는 기초과학 연구의 책임성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최근 필자 조사에 의하면 우리 대학 교수들이 수행하는 연구에서 책임을 느끼는 대상은 70% 이상이 자기 자신이며 지도학생이나 정부 혹은 국민에게 느끼는 책임성은 모두 합쳐 10% 수준에 불과했다. 이런 불일치가 우리 기초과학 지원의 규모와 방식에 견해 차이를 불러온다.
한 국가의 기초과학 투자 적정 규모는 누구도 산출해 낼 수 없다. 따라서 기초연구비중 혹은 기초과학 연구지원의 규모에 대한 논의는 초점을 벗어난 것이다. 그보다는 장기적이고 결과가 불확실한 기초과학 연구 지원을 국가경쟁력 제고를 위한 목적성 연구 지원과 어떻게 차별화할 것인지가 더욱 중요하다. 우리의 천편일률적인 연구비 지원 방식은 연구자들을 옥죄면서도 정작 정부가 기대하는 경제적 성과도 충분히 거두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초과학 투자는 필연적으로 관련 분야 박사 배출을 증가시키지만 정책 논의 과정에서 갈수록 심각해지는 젊은 박사의 일자리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기초과학이 갖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성찰과 합의 과정에서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기초과학정책 수혜자는 연구자들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라는 사실이다.
박기범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연구위원, soli@stepi.r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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