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억원 이상 고액자산가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자산관리(WM)' 서비스가 문턱을 낮춘다. 증권사에 이어 시중은행까지 로보어드바이저(RA) 서비스의 상용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누구나 부담 없이 맞춤형 조언을 받는 시대의 개막이다.
다양한 산업에서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등을 결합한 4차 산업혁명이 급물살을 타고 있는 가운데 변화의 기로에 선 은행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22일 금융권에 따르면 주요 시중 은행은 최근 마무리된 로보어드바이저 1차 테스트베드 결과를 바탕으로 자산관리 서비스에 속도를 붙였다. 이미 일부 서비스를 선보인 신한은행과 NH농협은행에 이어 우리은행도 이달 중 온라인 자산관리 플랫폼에 로보어드바이저를 탑재, 출시할 예정이다. KB국민은행과 IBK기업은행도 서비스 출시를 준비하고 있다.
◇로보어드바이저가 뭐기에
로보어드바이저는 로봇을 뜻하는 로보(Robo)와 투자·자산관리 전문가를 의미하는 어드바이저(Advisor)를 합친 용어다. 과거 데이터를 바탕으로 컴퓨터 공학 예측 결과를 보여 주는 '퀀트'와는 다르다. 고객의 자산 현황, 투자 성향, 목표 수익률 등을 진단하고 다양한 시장경제 지표를 학습·분석해서 최적화된 자산 배분 전략을 제시한다. 프라이빗뱅커(PB)라 불리는 자산관리 전문가가 고액자산 고객에게 주로 제공하는 전담 서비스의 일부를 AI 로봇이 대신하는 것이다.
전통의 자산관리 영업이 소수 부유층에 집중됐다면 로보어드바이저는 일반 자산가를 대상으로 한다. 은행 고객의 절대 다수를 차지함에도 자산 규모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거나 비싼 수수료 부담으로 인해 충분한 자산관리 서비스를 받지 못하던 고객층이다.
금융권 관계자는 “최근 재테크에 관심이 많은 젊은 고객층 중심으로 자산관리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다”면서 “로보어드바이저가 WM서비스 대중화에 기여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은행은 전통으로 대출이자와 예금이자 차이에서 발생하는 이자 수익 의존도가 높다. 올해도 예대 마진 확대로 주요 시중 은행들이 '깜짝 실적'을 거뒀지만 건강한 수익 구조 확보와 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로보어드바이저를 활용한 자산관리는 대고객 금융 서비스의 질을 높임과 동시에 비이자 수익을 활성화할 견인차로 꼽힌다. 초기 인프라 구축과 조직 정비가 완료되면 추가 고객 유치에 드는 비용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낮은 수수료를 유지하더라도 은행권 자산관리 고객 저변 확대로 규모의 경제가 가능하다는 분석이다.
◇시중은행 서비스 속속 출격
은행권은 주로 로보어드바이저 기술 역량이 있는 전문 업체와 손잡았다. 협력 관계를 맺은 유망 스타트업에 직접 투자까지 단행했다.
시중 은행 가운데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 개발에 적극 뛰어든 곳은 신한은행과 농협은행이다. 신한은행이 선보인 모바일 로보어드바이저 자산관리 서비스 '엠폴리오(M-Folio)'는 10만원부터 포트폴리오 투자가 가능하다. 엠폴리오로 펀드에 가입한 고객은 지속해서 자산 진단과 리밸런싱 제안 서비스를 받는다. 로보어드바이저 전문업체 디셈버앤컴퍼니와 컨소시엄을 구성, 서비스를 개발하고 금융 당국의 테스트베드를 통과했다.
농협은행은 지난해 8월 퇴직연금 자산 운용과 은퇴 설계 기능에 로보어드바이저를 접목한 'NH로보-프로(Pro)'를 내놨다. 자체 개발 알고리즘으로 연금 설계 시뮬레이션 결과를 퇴직연금 자산 배분에 연동, 차별화를 제공한다. 알고리즘을 고도화해 비대면 서비스로 확대할 계획이다.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은 올해 3년차를 맞은 로보어드바이저 스타트업 파운트와 협업했다.
그동안 베타 서비스를 진행해 온 우리은행은 이번 주 '우리로보알파'를 출시한다. 인터넷뱅킹, 스마트뱅킹, 영업점, 위비플랫폼 등 은행이 보유한 전 영업 채널을 활용해 고객 접근성을 높일 예정이다. 고객 투자 성향을 분석해서 적합한 펀드 상품 등을 추천하고, 비대면 상품 가입까지 지원한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고객이 원하는 수익 모델과 투자 성향에 맞는 제품군을 구성해 포트폴리오를 제공하고, 금융시장 동향이 변화하거나 이벤트 발생 시 리밸런싱 정보를 전달해 적절한 판단을 하도록 돕는다”고 설명했다.
기업은행도 로보어드바이저 자산관리 서비스를 조만간 선보인다. 기업은행은 금융 당국이 실시한 로보어드바이저 수익률 테스트에서 안정추구형, 위험중립형, 적극투자형 등 3개 유형 모두가 선두자리에 올랐다.
지난해 '사이버 PB 서비스'를 자체 개발해 선보인 KEB하나은행도 최근 협력업체를 선정하고 2차 테스트베드에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익률보단 '자산관리'가 핵심
로보어드바이저 테스트베드 결과가 발표되고 일각에서는 은행권 로보어드바이저 수익률이 기대 이하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은행 가운데 가장 높은 수익률을 거둔 기업은행의 'IBK-파운트 일임형 ISA(3.58%)'조차 전체 1위를 기록한 ChFC한국평가인증 'MyGPS(5.77%)'에 비해 2% 넘는 차이를 보였다.
시중 은행 관계자는 “로보어드바이저의 도입은 단순한 수익률 극대화보다 누구나 체계화된 자산관리를 받을 수 있도록 문호를 넓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면서 “아직 로봇에 모든 자산관리와 투자를 일임하기는 어렵지만 고객의 합리 선택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정은기자 jepark@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