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가정용 세탁기 긴급수입제한(세이프가드) 조사를 시작했다. 미국이 수입하는 세탁기 대부분은 삼성전자와 LG전자 제품이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고 있는 가운데 국내 주력 수출 품목을 정조준한 것이어서 정부 차원의 대응 전략이 중요해 보인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ITC는 월풀이 지난달 제출한 세이프가드 청원 검토를 끝내고 5일부터 조사에 들어갔다. 세이프가드는 특정 품목의 수입 급증으로 자국 제조업체가 피해를 보는 상황을 막기 위한 조치다. 덤핑 등 불법 행위를 하지 않아도 자국 업체가 심각한 피해를 보면 수입을 제한할 수 있다.
세이프가드 조치는 특정 기업에 적용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미국이 수입하는 세탁기 대부분이 삼성전자와 LG전자 제품임을 감안할 때 국내 제조업체의 피해 확대가 예상된다.
월풀은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멕시코, 중국에서 세탁기를 생산·수출해 오다가 미국이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자 생산지를 베트남과 태국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우회 덤핑을 했다며 특정 수량 이상으로 수입하는 세탁기에 반덤핑 관세를 부과해 줄 것을 ITC에 요청했다.
ITC는 9월 공청회를 열어 당사자 의견을 수렴한다. 10월 5일까지 월풀이 세탁기 수입 급증으로 실제 피해를 봤는지 판정할 계획이다. 실제 피해가 확인되면 ITC는 트럼프 대통령에게 관세나 수입량 제한 등 필요 조치를 권고한다.
세이프가드 조사에 대해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즉각 반발했다.
삼성전자 미국법인은 “소비자는 우리의 디자인과 혁신으로 삼성 세탁기를 구매하고 있다”면서 “이들 소비자가 이번 청원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볼 수 있다”며 삼성 세탁기 수입이 월풀에 피해를 준다는 주장을 반박했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세이프가드 조사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과 다른 게 없다”면서 “조사 일정에 맞춰 적절하게 대응해 나갈 방침”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대형 법무법인 '아널드&포터 케이 숄러'를 선임하고 ITC에 제출할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
LG전자도 월풀의 청원이 미국 소비자들의 선택을 제한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LG전자 관계자는 “미국 내 산업에 피해가 없었다는 것과 세이프가드가 미국 소비자 및 유통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ITC 조사에서 적극 소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업계에서는 정부 차원의 대응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ITC가 올해 초 중국에서 생산한 삼성전자·LG전자 세탁기에도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는 등 보호 무역 강화에 해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미국 내 공장 설립 등 투자에 적극 나서며 미국 보호무역주의를 타개하려는 움직임에 맞춰 정부도 적절한 기업 지원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이달 초 관련 업계와 함께 '미국 수입 규제 대응 회의'를 열었다. 세탁기뿐만 아니라 한국산 태양광 셀·모듈, 폴리에스터 단섬유 반덤핑 조사 등 미국 수입 제한 시도에 적극 대응키로 했다. 세이프가드 관련 현지 동향을 면밀히 모니터링하는 등 큰 그림에서 대응 전략을 짜고 있지만 아직 세부 전략은 나오지 않은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세탁기뿐만 아니라 여러 품목에 대한 수입 규제 조치가 이어지고 있어 각론 마련에 시간이 걸린다”면서 “모니터링을 지속하는 한편 신속한 상황 파악과 함께 적절한 대응 전략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