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회장 김명자·이하 과총)가 회원 2300여명을 대상으로 문재인 정부의 '원전 관련 설문조사'를 돌연 중단, 폐기했다. 탈원전 등 정부 에너지 정책에 대한 과학기술자들의 의견을 묻고 공개 포럼을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취소했다. 정부의 탈원전 기조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과기계가 스스로 침묵을 택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18일 과기계에 따르면 과총은 지난달 12~15일 나흘 동안 '에너지 정책 방향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과총은 결과를 공개하지 않기로 하고 해당 자료를 폐기했다. 과총은 “설문 실시 결과 응답 집단이 편중돼 있어 취지에 맞는 표본을 확보하지 못했다”면서 “설문 취지를 달성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본지가 입수한 설문 문건은 7개 대분류와 총 20개 설문 문항으로 구성됐다. 새 정부의 에너지 정책 선호도를 물어 보고 탈원전·탈석탄·신재생에너지 정책에 대한 찬반 여부와 긍정·부정 영향 등을 조사했다.
설문은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인 데다 고리원전 1호기 영구 정지(6월 19일)를 앞두고 이뤄진 설문조사인 만큼 과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에너지 패러다임 전환을 예고한 상황에서 이뤄진 첫 과학계의 의견 수렴이라는 의미도 있다.
설문 결과가 비공개·폐기되고, 지난달 21일 설문 결과를 논의하려던 '신에너지 포럼'도 열리지 않았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설문 메일과 함께 과총으로부터 신에너지 포럼 참석 가능 여부를 묻는 전화를 받았다”면서 “그 후 연락이 없어 궁금했는데 설문 결과가 폐기된 사실은 몰랐다”고 말했다.
설문에 참여한 과학기술자는 “정부의 탈원전 기조에 반하는 설문 결과가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설문에 참여한 교수들은 “설문 전체는 새 정부의 에너지 정책 방향을 다뤘지만 결국 핵심은 탈원전 정책에 대한 찬반 여부였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설문조사 결과는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 기조와 어긋난 것으로 확인됐다. 과총 관계자에 따르면 탈원전 정책에 대한 부정 답변이 더 많았다. 자료 폐기 전에 설문 결과를 봤다는 전문가도 “탈석탄 정책은 찬성이 약 60%였지만 탈원전 정책은 반대가 60% 수준인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과학계 인사도 “사안이 부담스럽고 개인이 언급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탈원전 정책에 부정 의견이 많은 것은 맞다”고 같은 입장을 내놓았다.
정부가 신고리 5·6호기 공사를 일시 중단하는 등 탈원전에 속도를 내고 있는 가운데 정책 방향과 반대되는 결과를 전하기엔 과총의 부담이 컸을 것으로 해석된다. 과총은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 위원 추천 기관 여섯 곳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하다.
과기계는 과총이 설문 결과를 공개하지 못한 배경에 공감하면서도 단체의 중립성을 해하는 선택이었다고 아쉬워했다. 설문 결과 공개 시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자체 검열을 한 셈이기 때문이다. 한 과학기술자는 “모집단의 편향성과 결과의 왜곡성이 있다는 과총의 판단도 자의 해석”이라고 꼬집었다.
과기계 관계자는 “이미 새 정부의 원전 정책에서 과기계는 소외된 상황으로, 설문 결과가 정책 제안이 아닌 비난의 빌미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면서 “설문 폐기도 문제지만 원자력 분야에서 과기계가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게 더 안타깝다”고 말했다.
조정형 산업정책부(세종) 기자 jenie@etnews.com
공동취재 송혜영, 송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