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발전하는 속도가 빨라지면 시장의 패러다임 교체 주기가 짧아진다. 1·2차 산업혁명이 각각 일어나기까지는 100년 남짓한 시간 간격이 존재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3차 산업혁명이 채 끝나지 않았다는 주장과 4차 산업혁명이 이미 시작됐다는 의견이 뒤엉킨 형국이다. 같은 시대에 서로 다른 산업혁명이 언급될 정도로 변화가 빠른 시대다. 시장 패러다임이 '플랫폼'에서 '모듈'로 넘어가는 듯하다.
미국 최대 통신사업자 버라이즌은 얼마 전 '야후' 인수를 공식 선언했다. 지난 1990년대 야후가 곧 인터넷을 의미할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는 점을 감안하면 격세지감이다.
당시에는 포털이 정보통신(IT) 산업의 패권을 쥐고 있었다. 새롭게 열린 인터넷 세상에서 전화번호부와 지도 역할을 수행하며 사용자를 불러 모으고, 덩치를 키웠다. 이후에는 플랫폼이 포털이 쥐고 있던 패권을 넘겨받았다. 아이폰이 처음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하드웨어(HW)뿐만이 아니다. 운용체계(OS) iOS와 앱스토어 등 애플 전체 플랫폼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메신저 플랫폼 업체이던 카카오가 국내 2위 포털 다음을 인수했다. 플랫폼으로 힘이 이동하는 것을 보여 준 상징 사건이다.
최근에는 시장 흐름이 점차 모듈로 넘어 가고 있다. 모듈이 플랫폼과 가장 차별화되는 것은 유연성과 개방성이다. 예를 들어 애플 앱스토어용 애플리케이션(앱)을 구글 플레이스토어에 등록하려면 안드로이드 플랫폼에 맞춰 수정해야 한다. 참여자는 플랫폼이 정한 규칙을 따라야 한다.
반면에 모듈은 동등하게 병렬로 연결하는 방식에 가깝다. 장난감 블록 레고를 생각하면 쉽다. 동일한 블록이 중세 성벽이 될 수도 있고, 스포츠카 차체가 될 수도 있다. 무엇과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 물체와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
정보기술(IT) 업계가 사용하는 응영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가 모듈의 유연함을 보여 주는 좋은 예다. 상호 간 약속을 지키면 데이터를 주고받을 수 있다.
지난날 기업들은 고급 기술을 개발하면 기밀을 유지하거나 폐쇄된 플랫폼 내에서 운용하려 했다. 모듈화 패러다임이 지배하는 지금은 오히려 기술을 공개한다. 많은 사람의 참여를 유도, 궁극으로 생태계 내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함이다. 구글이 인공지능(AI) 관련 기술을 오픈소스로 제공하는 게 대표 사례다.
시장 패러다임이 플랫폼에서 모듈로 넘어가는 것은 IT 업계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다. '제조업의 꽃'이라 불리는 자동차 업계도 모듈화 작업이 한창이다. 플랫폼 방식은 기본 골격을 고정시킨 채 외관을 바꾸는 형태다. 차를 여러 블록으로 잘게 쪼개 조립하는 모듈 방식은 플랫폼 방식보다 더 유연하게 다양한 모델을 만들 수 있다.
모듈화는 기업 간 역학 관계에도 변화를 일으킨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상생 문제를 플랫폼과 모듈 개념에 대입해 보자. 그동안 대기업은 규칙을 정하고, 납품 중소기업은 이에 종속돼 따르는 방식을 유지했다.
산업을 모듈화하면 각각 스스로의 모듈, 즉 상품과 서비스 본연의 완성도만 신경 쓰면 된다. 구글의 AI 모듈처럼 그 자체가 경쟁력이 있다면 범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수평 업무의 분업이 인더스트리 4.0 시대의 협업 방식이다. 우리 사회가 모듈화가 몰고 올 광범위한 변화에 대비를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재석 카페24 대표 jslee@cafe24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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