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과학자와 과학계 원로, 정책 전문가가 한 목소리로 '과학기술혁신본부'의 성공을 위해 예산권 확보가 필수라고 강조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범 부처 차원의 중·장기 혁신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봤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지난 11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연 '제114차 한림원탁토론회'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문재인 정부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내 혁신본부 부활을 반기며 권한 강화를 주문했다.
정선양 건국대 교수는 주제발표에서 이론 차원에서 과학기술 정책 흐름을 분석, 혁신본부 설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과학기술 정책이 통합, 융합되기 때문에 이를 뒷받침할 기구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국가 연구개발(R&D) 사업 예비타당성조사권, R&D 예산 지출한도(실링) 공동설정권을 범 부처 혁신정책을 내실 있게 수행할 핵심 도구로 지목했다.
정 교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과학기술 정책의 발전사를 보면 3세대에 들어서면서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발전,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포괄적 목표 달성을 추구한다”면서 “부처 간 R&D, 혁신 정책의 통합 조정, 일관된 중장기 정책 수립을 강조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이어 “최근 논의되는 '포용적 혁신'을 달성하기 위해서도 이런 정책이 필요한데, 이 전략을 제대로 뒷받침하려면 통합적 기구가 필요하다”면서 “이것이 바로 과학기술혁신본부”라고 설명했다.
혁신본부를 부처 별 R&D 칸막이를 해소할 플랫폼 조직으로 이해한 시각이다. 플랫폼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전문성을 갖춘 별도 트랙의 예타조사권, 예산배분권이 필요하다.
그는 “R&D 예산은 결과를 기다려줘야 하는 '인내 자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통상적인 비용-효과 분석은 부적절하고 별도 예산 배분권이 중요하다”면서 “예산 배분권에 앞서 통합 정책 추진이 전제된다면 R&D 예산 배분·조정권한을 가져오는 것도 타당성을 갖출 것”이라고 말했다.
안준모 서강대 교수는 “과거와 달리 과학기술 중심사회라는 용어가 더 이상 추상적이지 않을 만큼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여러 기능, 변화가 맞물리고 있다”면서 “혁신본부 설치는 매우 빠른 기술 변화에 따른 불확실성을 낮추고 중장기 계획을 만들겠다는 의지”라고 설명했다.
이장재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 선임연구위원은 “과학기술 정책이 전통 R&D 정책에서 기술혁신 정책으로 전환되기 때문에 혁신본부 중요성이 크다”면서 “시스템 실패로 인한 사회경제 영향, 과학기술 성과를 살핀다는 측면에서 혁신본부 부활은 환영할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어진 토론회에서는 혁신본부의 예산권이 중점 논의됐다. 대부분 참석자가 별도 예산권 확보를 지지했다. 참여정부 시절 혁신본부의 '미완의 성공'을 보완하려면 예타조사권, 지출한도 설정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신본부는 참여정부 시절 운영됐지만 실제 예산권이 없어 '미완'에 그쳤다는 평가가 많다. OECD가 주목한 국가 혁신 모델이었지만 자리잡지 못하고 해체됐다.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 '지속가능한 과학기술혁신 거버넌스 발전방안' 보고서는 컨트롤타워 기능 약화로 부처 간 정책 조정력이 줄고, R&D 활동 미시 조정 역할에 머물렀다고 지적했다.
안 교수는 “과거 혁신본부 사례를 보면 부처 별 고립된 R&D 활동이 제대로 통합됐는지 의문”이라면서 “기재부와 과기부의 예산 배분 권한이 명확히 풀리지 않으면서 혁신본부가 심의하고, 기재부가 다시 심의하는 '옥상옥'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R&D 예산에서 '인내자본'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고, 페니실린, 비아그라 사례에서 보듯 기술 발전은 우연성도 있기 때문에 현재의 비용편익 분석은 부적절하다”면서 “장기화하는 예타 제도는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위원은 “예타는 반드시 혁신본부에 가져와야 한다. 지금은 기재부가 예타에도 관여하고 최종 예산 배분에도 관여하는 복잡한 구조”라면서 “R&D 예타는 혁신본부로 가져와서 간편하고 빠르게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토론회 참석자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혁신본부의 '선수심판론'을 적극 반박했다. 선수심판론은 국가 R&D 사업을 가장 많이 수행하는 '선수(과기정통부)'가 '심판(예산배분·예타심사)' 역할까지 맡는 것은 공정치 못하다는 논리다. 기재부도 이 논리를 들어 혁신본부 관련 법 개정에 반대했다.
김두철 기초과학연구원(IBS) 원장은 “옛 미래창조과학부가 부처 별 R&D 예산을 조정할 때도 미래부 사업, 타 부처 사업 예산 협의에 큰 차이가 없었다. 미래부가 기획한 사업의 집행을 다른 부처에 이양한 사례도 많다”면서 “혁신본부가 과기정통부 산하에 있더라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혁신본부 정책과 예산 배분 전문성을 강화해 우려를 불식시키자는 의견도 나왔다. 정 교수는 “혁신본부를 최고 전문가로 구성해야 예산당국과 다른 부처도 신뢰를 보낼 것”이라면서 “가칭 예산배분 실명제를 도입하고 투명성을 제고해 우려를 저감시킬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송준영기자 songj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