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드만 삭스는 기술회사다.” -로이드 블랭크파인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CEO)
“10년 내 전통금융 산업이 기술에 의해 파괴되는 우버 모멘트(Uber Moments)가 온다.” -앤터니 젠킨스 전 바클리 CEO
“많은 은행이 5~10년 내 사라진다.” -프란시스코 곤살레스 빌바오비스카야 아르헨타리아 은행(BBVA) 회장
세계 글로벌 은행 CEO들이 전망한 금융산업의 현재다. 수십조원의 자산을 보유한 금융사는 이제 IT기술 혹은 또 다른 무엇에 의해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국내 금융시장은 물론 세계 금융산업은 이제 기술에 의해 시장 지배자가 바뀌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금융 산업도 생태계와 채널, 인력 등 모든 것을 갈아엎어야 생존할 수 있는 무한경쟁이 시작됐다.
금융산업의 미래를 말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IT 접목 방법론이다.
기술에 의해 시장 지배자가 바뀐 사례는 예전에도 있었다.
2011년 세계 도서유통업 1위 기업 보더스그룹은 IT와 유통을 결합한 아마존에 의해 파산의 길을 걸었다. 이후 미국 대형 서점 체인 반스&노블에 인수됐다.
영화대여사업자인 블록버스터는 넷플릭스, 음원 유통기업 타워 레코드는 애플, GPS선두기업 가민은 구글 맵스 출현으로 각각 시가총액 85%가 감소하는 수모를 당했다.
금융산업도 글로벌 핀테크 기업 등장으로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아직은 현상 유지를 하고 있지만 각종 수수료와 예대마진으로 최대이익을 내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
결국 IT를 새로운 채널로 흡수하지 못하는 금융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다.
국내 은행은 물론 증권, 보험, 카드사 등 모든 금융사는 핀테크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이는 '개선'에 머물 뿐 '혁신'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앞으로 금융산업의 경쟁력 지표는 '디지털 채널'을 얼마나 잘 구축했느냐가 핵심 열쇠가 될 것이다.
이미 글로벌 은행은 디지털 채널에 막대한 투자를 시작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는 2010년 이후, 매년 모바일 채널에 5억달러 이상을 투자한다. ING생명은 2021년까지 디지털 채널 투자에 8억유로를 쏟아 붓는다. HSBC는 트랜잭션 뱅킹 시스템 개발에 30억달러를, RBS는 올해 리테일 디지털 채널 개발에 10억 파운드를 각각 투자한다. 세계 리테일 뱅킹 IT투자규모는 5년간 연평균 4.7% 증가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예상했다.
글로벌 은행이 디지털 채널에 막대한 투자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마차를 아무리 많이 늘어놓아도 기차를 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재래식 창구 위주의 비즈니스는 이미 퇴출 절차를 밟고 있다.
한국도 상황은 비슷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마차를 늘리는 작업에만 몰두하고 있다.
국내 핀테크 1세대로 꼽히는 한준성 하나은행 부행장은 “한국 금융산업은 공급자 중심 발전으로 무겁고 복잡한 형태에 머물고 있다”면서 “소비자는 서비스를 선택할 때 접근과 이용 편의성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기 때문에 이제 국내 금융사는 시스템 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서비스 프로세스를 대폭 개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리서치조사기관 설문 중 재미있는 내용이 있다.
아카마이의 조사에 따르면 웹페이지가 열릴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은 응답자의 47%가 2초라고 대답했다. 한국 소비자 중 88%는 애플리케이션(앱) 로딩 포기에 걸리는 시간이 단 6초다.
앱 이용 또는 구매 시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75% 응답자가 '사용하기 쉬운 기능'이라고 답했고, 65%(중복 가능)가 편의성이라고 응답했다. 보안 문제가 생기면 브랜드를 떠나겠다는 응답자도 17.3%에 달했다.
편의성과 보안 모두를 만족할 디지털 채널 구축이 금융 산업의 핵심 경쟁력으로 부상했다는 말이다.
과거 최고 직종으로 손꼽히던 은행 인력은 50세를 채우지 못하고 생존 경쟁의 기로에 놓였다.
실제 국내 은행들은 3년 동안 적자 나는 점포를 절반가량 폐쇄했다. 적자 점포는 문을 닫고 가까운 점포는 통폐합하는 은행 구조조정이 본격화됐다.
금융 전문가들은 급격한 IT 발달과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고객 취향까지 감안하면 오프라인 지점을 통해 고객을 만나고 영업 서비스를 해 온 기존 관행은 빠른 시일 안에 사라질 것으로 전망했다.
단순히 IT 비대면 채널 도래로 전통의 뱅커 시스템이 몰락하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은행과 증권사, 카드사 등은 비대면 채널 준비를 오래 전부터 해 왔다.
그렇다면 경쟁력 측면에서 왜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것일까. 사용자 습관을 제대로 읽지 못하기 때문이다. 디지털 채널 구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전통 채널과 디지털 채널을 따로 생각한다. 융·복합화를 하지 않는다. 또 아직까지 공급자 위주의 전략, 플랫폼을 고수한다.
전통 금융사는 이제 오픈 이노베이션 모델로 조직 자체를 바꿔야 한다. 기존 항아리형 인력 구조와 점포로는 변화의 중심에 설 수 없게 된 것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이란 사내에 한정하지 않고 혁신 기술과 아이디어를 수입하고 투자해서 융합하는 개방형 채널을 구축해야 한다.
<박스> 세계는 지금
금융산업 성공 열쇠는 디지털 채널을 얼마나 현지에 맞게 구축하느냐다. 이런 의미에서 케냐 사례를 볼 필요가 있다.
세계 최초로 모바일 송금을 시작한 곳은 저개발 국가인 케냐다.
이동통신사인 사파리콤이 제공하는 M-PESA라는 서비스가 모바일 송금의 시초로 꼽힌다. 은행이 아닌 통신사가 송금 시장을 장악했다.
휴대전화를 사용, 송금 이외에 난방비와 수업료 등 일상에서 이뤄지는 지불이 가능한 솔루션을 공급했다.
이용자는 사파리콤 창구에 가서 송금액과 수수료를 지불한다. 그 후 송금 상대방에게 휴대전화로 송금액을 전달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비밀번호를 보낸다. 메시지를 받은 상대방은 사파리콤 창구에서 해당 화면과 비밀번호를 제시하고 현금을 받는다. 은행을 끼지 않는 이 송금 방법은 은행계좌를 트지 못한 빈곤층 서민을 끌어안았다. 디지털채널의 현지화다.
2007년에 시작된 서비스 등록자 수는 매년 늘어나 2017년 현재 3000만명을 넘어섰다.
일용 잡화점을 중심으로 하는 서비스 대리점은 10만개를 넘었고, M-PESA를 통해 1개월에 약 19억달러의 휴대머니가 오간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지불결제 시스템을 송두리째 바꾼 카드리더기 사례도 있다. 젊은 청년 두 명이 설립한 이머지모바일은 휴대전화에 소형 카드리더기를 결합했다. 휴대폰을 신용카드 단말기로 사용한 것이다. 이전까지 신용카드 결제가 불가능하던 소규모 상점 중심으로 이용자는 급격히 확산됐다.
해외 인터넷전문은행 성공 사례도 눈여겨볼 만하다. 국내 케이뱅크와 카카오뱅크가 절반의 성공을 거뒀지만 가야할 길이 멀다. 또 전통 은행과 차별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는 이르다.
일본 세븐뱅크는 편의점을 활용했다. 세븐일레븐 체인점의 유통망을 접점으로 성공을 거뒀다.
일본 현지에 있는 2만여 세븐일레븐 편의점망을 활용, ATM기기에 금융서비스를 융합했다.
비자, 아멕스, 유니온 페이 등과 제휴해 외국인 송금과 입출금을 ATM기 하나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ATM 등 해외송금 등 금융상품 중개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라쿠텐뱅크는 일본 쇼핑몰 1위 라쿠텐이 지분 100%를 보유한 자회사다. 이 은행은 쇼핑몰 주요 고객인 젊은층을 대상으로 신용대출사업을 접목했다. 페이스북·이메일 송금 등 특화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쇼핑몰 플랫폼을 철저히 활용한 사례다. 그 결과 매년 고객수가 9.6% 증가하는 저력을 보였다.
핀테크가 금융 시장 파괴로 불리는 이유는 금융사가 아닌 IT 기업이 금융업에 진출하고, 자금과 담보가 아닌 IT를 전면에 내세워 기존의 금융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엎고 있기 때문이다.
이종업종 간 상생 모델과 디지털채널 융합이 전통 금융을 뛰어넘을 수 있는 동인을 확보할 수 있는 대안으로 꼽힌다.
길재식 금융산업 전문기자 osolgi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