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의 중국 신규 투자에 급제동을 걸면서 산업계 후폭풍이 거세다. 중국 동반 진출을 위해 합작 법인 설립이나 현지 공장 증설을 검토하고 있던 장비·재료업체는 계획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판이다. 대기업 설비 투자가 늦어지거나 중단되면 장비업계는 매출 감소가 불가피하다.
20일 업계에 따르면 산업통상자원부가 최근 중국 투자 재검토를 요청한 이후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는 대책 회의에 들어가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주요 장비업체도 비상경영회의를 열고 대기업의 중국 진출 좌절에 대비한 경영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다. 본지 9월 19일자 1면, 9월 20일자 3면 참조
LG디스플레이는 산업부 간담회 이튿날에 열린 19일 정기 경영회의에서 중국 투자 대책을 놓고 장시간 논의했다. 그러나 현지 정부 투자금 유치, 운영 생산성 등의 대안을 마련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폐쇄를 앞둔 국내 5세대 이하 저세대 액정표시장치(LCD) 라인 부지가 있지만 전체 LCD 공급, 부지 크기, 자금 조달 등 문제 때문에 국내로의 투자 전환도 어렵다는 결론만 내렸다.
산업부는 20일 LG디스플레이 중국 진출 승인을 놓고 '전기전자 소위원회'를 열었다. LG디스플레이는 이 자리에서 중국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투자 배경과 현지 보안 대책을 적극 설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10.5세대 OLED, 6세대 플렉시블 OLED로 이어지는 투자 순환 전략의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했다.
백운규 산업부 장관은 지난 18일 열린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 비공개 간담회에서 중국 진출을 재검토하는 것이 좋겠다는 취지로 발언했다. 산업부는 백 장관 발언이 파장을 일으키자 “국내 투자를 확대해 달라는 취지”라며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국가 핵심 기술의 수출 승인 절차를 강화하는 등 산업부 최근 행보는 비공개 간담회에서 드러난 백 장관의 의지와 맥이 닿아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장 큰 타격이 예상되는 기업은 LG디스플레이다. LG디스플레이는 지난 1년 동안 대형과 중소형 OLED로 사업 구조를 전환하기 위한 중장기 투자 전략을 고심해 왔다. 중국 정부 자금을 유치해 8.5세대 OLED를 추가로 짓고, 여기서 발생한 수익을 10.5세대와 6세대 OLED에 투자하는 선순환 구조를 계획했다.
광저우 8.5세대 OLED 투자는 부족한 자금을 중국 정부가 보완하고 생산에 따른 이익을 최대한 높일 수 있는 전략이다. LG디스플레이는 2013년부터 국내에서 8.5세대 OLED를 생산했다. 그러나 세계 최초로 생산한 만큼 기술 난도가 높아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고도 아직 연간 흑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생산 능력이 아직 충분하지 않아 흑자 전환도 어렵다.
중국 8.5세대 OLED 투자는 파주 10.5세대 OLED 투자에도 영향을 미친다. 10.5세대에서는 65인치, 75인치 등 초대형 패널을 효율 생산할 수 있다. 빠르게 10.5세대 기술에 투자해서 생산비용을 최소화하면 초대형 OLED와 LCD 간 가격 차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LG디스플레이에 유리하다.
문제는 자금이다. 한정된 자금으로 10.5세대 OLED와 6세대 플렉시블 OLED에 모두 투자해야 한다. 현재 8.5세대 OLED는 시장 수요에 비해 보유한 생산 능력이 부족하다. 세 가지 사업에 동시 투자해야 하지만 수십조원을 조달한다는 건 어렵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국 공장 증설이 막히면 공급 부족이 심화돼 오히려 메모리 값이 올라 실적이 확대될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분석도 나왔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 제2기 3D 낸드플래시 공장을 짓고, SK하이닉스는 중국 우시에 신규 D램 클린룸을 확장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김선우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정부 요구로 인해) 메모리 판매 가격이 불가피하게 인상되는 정당성이 확보된다”고 분석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국내에도 신규 부지가 넉넉히 있고 디스플레이와 달리 수출 관세가 없는 데다 고객사가 세계 각지에 있어 타격이 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중국 지방정부와 맺은 투자 약속을 일방으로 파기하는 모양새가 돼 현지 생산 법인이 받는 각종 세제 혜택 등에서 불이익을 당할 우려가 있다.
중소·중견기업이 대부분인 후방산업계도 걱정이 크다.
디스플레이 장비 기업 관계자는 “기술 유출 우려 때문에 OLED 생산 라인을 중국에 지을 수 없다면 주요 OLED 전공정 장비까지 중국 판매가 막힐 가능성도 있는지 걱정”이라면서 “통상 몇 세대 이전 버전의 기술 제품을 수출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다고 보지만 고객사가 중국 판매 기준을 높이는 등 앞으로의 수출이 좀 더 까다로워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지는 않을지 우려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반도체 장비 업계 관계자는 “국내 고객사에 공급하는 물량이야 시기와 투자 지역 문제이지 투자 규모가 변하지는 않는다고 본다”면서도 “그러나 이번 건으로 중국에 미운 털이 박히면 현지 업체로의 수출길이 막힐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크다”고 말했다.
배옥진 디스플레이 전문기자 withok@etnews.com,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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