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협은행이 금융권 최초로 가상화폐 응용프로그램인터페이스(API)를 만든다. 가상화폐 거래소 등이 대규모 투자 없이도 API를 활용, 최근 높아진 정부의 가상화폐 보안 요건 지침을 충족할 수 있게 됐다.
21일 금융권에 따르면 농협은행이 최근 가상통화 거래소용 API 다섯 가지 기술 개발에 착수했다. 다음 달에 기술 개발을 완료하고, 금융감독원에 비조치 의견을 제출한다.
정부는 최근 부처 합동으로 가상통화를 금융업이 아닌 유사수신업으로 분류하고 규제를 강화했다. 우선 본인 확인을 강화, 가상통화 취급업자(거래소)의 거래 투명성을 관리하기로 했다.
그동안 대금 거래 과정에서 어떤 이용자가 입·출금을 했는지 본인 확인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보이스피싱 등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가상통화 거래소는 은행에서 부여받은 가상계좌를 통해 이용자 대금을 관리해야 한다. 은행을 통해 이용자 실명 확인을 마친 계좌만 가상계좌에 거래 대금을 입·출금할 수 있다. 가상통화 취급업자로부터 입금 받은 돈을 분산 출금하거나 거액의 현금을 자주 입금하는 이용자는 은행이 감독 당국에 의심 거래로 보고하도록 했다. 지침 시행 이전에 가상통화 사업자는 정부의 이 같은 요건을 맞춰야 한다. 결국 은행 시스템과 맞물려 가상통화 시스템과 인프라를 갖춰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방법이 없다.
농협은행은 개인간거래(P2P) 자금관리 서비스 등 핀테크와 관련된 API 83개를 개발 완료했고, 가상통화 거래소가 정부 요건을 맞출 수 있는 가상화폐 API 5종을 신규로 다음 달에 공개한다.
농협 API를 통하면 최소 수십억원의 자금이 드는 가상화폐 운용 인프라를 별도의 투자 없이 조합해 만들 수 있다.
농협은행 관계자는 “국내 최초의 가상통화 API 개발 막바지 단계”라면서 “다음 달 중순에 가상통화 거래소와 함께 테스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농협 가상화폐 API 공급은 그동안 은행의 텃밭을 열면서 자사 기술과 인프라까지 완전 오픈하는 셈이다. 그동안 없던 사례다.
간편 결제나 해외 송금 등 은행의 주요 영역에 핀테크 기업이 진입하면 은행은 단순 조회 등 일부분의 API만 제공하거나 일방으로 정보 서비스만 제공했다. 그러나 이번 가상통화 API에는 지급 결제부터 보안 요건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기술을 담았다. 기존 83개 API를 조합하면 가상통화 관련 업체가 차별화한 서비스를 재생산할 수도 있다.
정부가 제기한 가상통화 관련 운용 지침은 일반 가상통화 업체가 자체 해결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현재 가상화폐 관련 인프라와 기술을 확보한 은행도 없다.
은행권 관계자는 “P2P에 이어 가상통화 API까지 공개되면서 전통의 은행들이 보유한 정보기술(IT)은 하나의 플랫폼 형태로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생태계가 도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길재식 금융산업 전문기자 osolgi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