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가 '블록체인'으로 다시 한 번 들썩이고 있다. 미국 서부 팔로알토에서 새너제이시에 걸쳐 길이 48㎞, 너비 16㎞ 띠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는 실리콘밸리. 제주도 면적 2배인 이곳은 세계 첨단기업 보금자리다. 스타트업 요람인 이곳은 몇 해 전부터 인공지능(AI) 바람이 불었고, 최근 블록체인을 주목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칼 트레인(Cal Train)'을 타고 1시간 30분 남짓 달려 도착한 플러그 앤 플레이 테크 센터. 민간 창업센터인 이곳은 300개 이상 스타트업이 입주해있다.
크라우즈(Crowdz)는 핫한 기업 중 하나다. 창업 5년 만에 26억원을 투자받았다. 크라우즈는 블록체인에 기반을 둔 기업간거래(B2B) 전자상거래 플랫폼 스타트업이다. 플러그 앤 플레이 내 크라우즈 사무실에서 만난 클레이 디듀스 디렉터는 자사를 '글로벌 전자상거래를 위한 디지털 실크로드'라고 표현했다.
그가 말하는 크라우즈 핵심은 원료 공급지부터 최종 생산자까지 연결하는 공급망에 '블록체인'을 적용하는 것이다.
중소기업은 제품 발주를 받고도 정작 상품판매 대금을 늦게 받아서 자금사정이 악화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크라우즈는 블록체인 기반 제노마켓(Zenomarket) 생태계를 구축, 상품판매대금 지연 지급이나 조작을 방지한다. 거래가 이뤄지는 동시에 결제까지도 가능해져 속도도 빨라진다. 제노마켓이 송장을 생성하면, 블록체인이 자동으로 송장을 경매 거래에 올려놓고, 투자자는 입찰에 참여해 송장을 구매하는 방식이다. 이에 따르는 거래 대금은 이후 송장을 판매한 중소기업으로 전달한다.
디듀스 디렉터는 “수주에서 수개월까지 걸리는 기업 간 여러 거래 대금 지불과 서류작업이 한 장소로 모아지면서, 시간 및 비용을 모두 줄이고 투명성을 높였다”며 “스마트계약 및 사물인터넷(IoT) 같은 새로운 디지털 기술뿐 아니라 골동품 등 값비싼 기업 간 상거래 시스템에 블록체인을 적용해 제품을 더 빠르게 사고 팔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크라우즈는 미국 소매유통업체인 월마트(Walmart), 독일 자동차부품업체 보쉬(BOSCH), SK텔레콤, 포스코 등과 손잡고 자사 기술을 적용 중이다.
가상현실(VR) 게임회사 '서브드림스튜디오'는 게임 유통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실리콘밸리 로스알토스에 소재한 이 스타트업에서 한국인 정직한 대표를 만났다.
정 대표는 게임 개발사와 플랫폼(유통사), 플레이어(소비자) 사이에 벌어지는 불투명한 매출 구조와 수수료 문제를 블록체인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현재 구조에서 중소 게임개발사는 개발비를 제대로 정산 받지 못하고, 소비자 또한 지불하는 게임비용에 비해 보상(리워드)이 없다.
정 대표는 “블록체인을 도입하면 단계별 거래가 장부에 기록되고 모든 참여자가 이를 검증할 수 있어서 수수료 없이 비용을 낮춘 게임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서브드림은 이를 위해 암호화폐 '유메리움(Yumerium)'을 발행했다.
소비자는 게임을 하면서 인센티브로 유메리움을 받을 수 있다. 자체 제작한 VR 아케이드에서 게임을 하면 유메리움을 쌓을 수 있다. 유메리움은 국내 VR방 프랜차이즈 'VR플러스'에서 사용할 수도 있다.
정 대표는 “블록체인으로 중간단계를 없애고 게임유저와 개발자를 가깝게 해주는 것이 궁극적 목표”라면서 “게임 개발 아이디어가 많은 유저들도 유메리움으로 펀딩을 받아서 개발자가 될 수 있도록 해 게임산업 경계를 없애겠다”고 말했다.
세타랩스(THETA Labs)는 스트리밍 서비스 문제를 블록체인 기술로 해결하는 스타트업이다.
세타랩스는 미국 쿠퍼티노 소재 e스포츠 가상현실(VR) 중계 플랫폼 '슬리버티비'가 설립한 자회사다.
VR스트리밍 같은 대용량 콘텐츠를 중앙집권화된 서버(CDN)를 통해 제공하려면 속도 저하뿐 아니라 콘텐츠 공급자 부담 비용도 상당하다. 이에 세타랩스는 블록체인을 활용한 탈중앙집권적 스트리밍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개인이 네트워크 중계자가 돼 대역폭을 빌려주고 이에 대한 보상을 세타토큰(Theta Token)으로 받는 방식이다. 사용자들이 콘텐츠를 공유·전송하고 토큰을 얻도록 동기를 부여했다.
미치 리우 세타랩스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세타 솔루션은 오늘날 비디오 배포에 소모되는 비용을 기존(CDN)보다 80%까지 줄일 수 있다”면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제공하는 유튜브, 넷플릭스 등 기업도 우리 서비스를 주목하게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실리콘밸리는 블록체인을 투자수단이 아닌 '기술'로서 접근하고 있다. 대기업이나 정부가 주도하는 블록체인 활성화가 이뤄지는 한국과는 정반대다. 오히려 작은 스타트업이 블록체인을 주도하고 대기업과 연결하고 있다.
블록체인은 투명한 어항 속에서 주고받는 거래와 같다. 중앙집권형 기존 산업에서 발생되는 불필요한 거래 비용을 낮추고, 많은 사람에게 평등한 기회를 주는 블록체인 기술 자체에 실리콘밸리의 관심과 돈이 몰리고 있다.
실리콘밸리(미국)=
김지혜기자 jihy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