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탈원전 정책이 국민투표 결과 폐기수순에 들어간다. 차이잉원 총통이 2016년 취임 후 야심차게 내건 정책이지만, 전력수급 부족이라는 현실 문제를 넘지 못했다. 대만 국민투표는 우리나라에서도 계속되는 탈원전 갈등에 불을 지필 전망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6월 고리 1호기 영구정지 행사에서 탈원전을 선언한 후 우리 사회는 소모적인 논쟁을 반복했다. 원전 이슈에 국민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만큼 대만처럼 정책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해외 탈원전 선언 국가는 국민 합의 절차를 거쳤다. 유럽 지역 대표적인 탈원전 국가인 독일과 스위스도 수 십년간 논쟁 후 각각 공론화와 국민투표 절차를 통해 탈원전 정책을 수립했다. 대만 역시 4번째 원전 프로젝트였던 룽먼 원전 완공을 두고 국민투표를 검토하는 등 과거부터 원전 이슈 국민투표 요구가 제기됐다.
우리나라 탈원전 선언은 국민 합의 보다는 정치적 선택에 의해 이뤄졌다. 우리 정부 에너지정책이 원전 축소 쪽으로 돌아선 계기는 2016년 9월 발생한 경주 지진이었다. 원전 인근 지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방사선 누출 가능성과 다수호기 안정성에 문제점이 제기됐다. 다음해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과 함께 5월 대선이 시작되자 후보자들은 저마다 원전 축소 공약을 내걸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과 함께 탈원전을 공식 선언했다. 이후 정부 에너지정책에서 원전 순위는 뒤로 밀려났다.
그동안 정부는 원전 육성 정책을 펼쳤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미국을 비롯한 다수 국가가 원전 건설을 취소하는 분위기에도 한국형 원전 OPR-1000을 개발했다. 수출형 원전 APR-1400 모델을 UAE에 수출했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친환경 전원으로 원전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원자력계가 갑작스런 탈원전 정책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배경이다.
대선 당시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탈원전 정책 등 공약에 대한 에너지계 반응은 “가능할까”였다. 이미 국가계획으로 수립하고 인허가까지 마친 상태에서 원전 공사를 중단하는 것은 유례가 없다. 에너지 관련 사업이 정부 승인 이후에도 정책적으로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다는 좋지않은 선례를 남겼다. 신고리 5·6호기는 우여곡절 끝에 건설을 재개했지만 중단을 위한 공론화 실시 여부만으로 충격이었다.
정부는 탈원전 명분으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결과를 내세운다. 당시 공론화위원회는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 여부와 함께 원전 확대 정책에 대한 찬반 의사도 물었다. 공론화위원회는 결과 발표 당시 참여자 중 53.2%가 원전 축소 의견을 보였다고 밝혔다. 공론화 착수 당시 계획에 없던 조사여서 논란이 됐다.
에너지 업계는 공론화의 원전 축소 의견을 탈원전 명분으로 삼기엔 무리가 있다고 반박했다. 김지형 공론화위원장이 조사에서 언급한 '원전축소'가 '원전제로'는 아니라고 국정감사를 통해 밝힌 데다 탈원전은 신고리 5·6호기 건설보다 범위가 큰 개념으로 별도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공론화가 탈원전 명분을 만들기 위한 정치적 선택에 이용됐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에너지 업계는 현 정부 에너지전환 정책에 대해 탈원전과 전기요금에 대한 선언적 목표를 문제점으로 지적한다. 대표적으로 '2080년까지 원전 제로' '2022년까지는 전기요금 동결' 두 가지다. 에너지 업계에서 확정적 단어 사용은 금기시된다.
과거 국제유가 200달러 돌파를 앞뒀을 때도 에너지 전문가 전망은 확정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는 고유가 시장에 대비에 대규모 자원개발에 나섰고 그 후 계속되는 자원가격 하락에 타격을 받았다.
무리하게 2080년 원전제로 목표를 내세우는 것보단, 원전 축소 계획만 밝힌 후 탈원전 선언은 에너지 수급 상황을 지켜보며 후세대에 넘기는 것이 현실적이다. 전기요금 동결 계획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이번 정권 임기 내에 석탄과 원전 설비규모가 증가하는 것은 맞지만, 전기요금 변화 요인은 그 외에도 많다. 수많은 전기요금 원가 요인이 소매시장에 반영되지 않고 있음을 간과했다. 정치권과 에너지 업계에서 탈원전 속도조절론이 나오는 이유다.
에너지 업계는 신고리 공론화가 아닌 에너지 정책 전반에 대한 국민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제3차 에너지기본계획 워킹그룹은 권고안을 내면서 전제 조건으로 국민 합의에 의한 전기요금 체계 개편을 언급했다. 탈원전과 재생에너지 확대 등 에너지 믹스 변화에 따른 전기요금과 국가산업지도, 생활환경 부문에서의 변화를 고려한 조사가 필요하다.
한국원자력학회 등 여러 기관이 여론조사를 벌이는 이유도 같다. 이달 원자력학회 조사에서는 원전을 늘리자는 응답자가 35.4%, 유지하자는 응답자는 32.5%가 나왔다. 반면, 지난 6월 한국갤럽 조사에서는 원전 비중 확대 응답이 14%에 머물렀다.
정부는 여론조사 관련 조사 주체의 중립성 문제를 지적했다. 같은 이유로 원전 찬반 양측도 서로 조사와 주장을 부정했다. 탈원전 논란이 계속되면서 사회적 손실만 늘어나는 모양새다.
대만 국민투표 결과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독일과 스위스는 유럽대륙에 속해 다른 국가와 전력망이 연결돼 있지만, 대만은 우리처럼 다른 곳과 연결된 전력망이 없다. 우리나라는 대만에 비해 전력수급이 여유로운 상황이다. 중장기 관점에서 에너지정책 국민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는 수급안전성 문제로 에너지전환 논의조차 힘들었다”며 “수급에 여유가 있고 정책적 의지도 있는 지금이 국민 합의를 구하기 위한 적기”라고 말했다.
조정형 산업정책부(세종) 기자 jeni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