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윤정의 XYZ코칭]<7> '할말하않' 대신 싫은 소리

[지윤정의 XYZ코칭]&lt;7&gt; '할말하않' 대신 싫은 소리

비닐하우스에서 모종 대하듯 길러진 후배들이 눈보라 휘날리는 광야 같은 직장에 입사했다. 한두 명 형제자매가 있는 핵가족과 부모의 전폭 지원을 받으며 자란 밀레니엄 세대는 악조건의 상황에 대처하는 면역력이 강하지 않다. 가정에선 웬만한 일을 감싸 주며 대신 해 줬고, 학교에서도 체벌보다 칭찬을 중요시 했다. 지적을 당하는 게 익숙지 않고, 꾸중은 낯설다.

그러나 직장은 가정이나 학교에서보다 안전하지 않다. 실수와 사고가 비일비재하고, 지적과 피드백이 빈번한 곳이다. 잘못 보낸 메일, 놓친 전화, 빠뜨린 서류 등 실수가 일어날 수 있다. 타인 때문에 억울하게 지적을 당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배우고 나아져서 점점 더 프로페셔널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직장에서 상사의 애정 어린 꾸중과 진정한 지적이 사라지고 있다. 선배들이 '할말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하고 있다. 작은 일에도 주눅들고 삐치니 눈치가 보이고, 며칠째 상처 받고 우울해 하니 신경이 쓰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부분을 지적한다고 해서 고쳐지지도 않는데 얘기해서 서로 감정만 상하느니 포기하는 게 낫다는 분위기다. 괜히 혼냈다가 꼰대질 한다고 지탄 받을까 걱정되고, 상사의 위력으로 '파워하라스먼트'(파워하라, 직장 상사의 권력을 이용해 부하를 괴롭히는 행위)했다고 신고당할까 두렵단다. 예전처럼 저녁 사 주며 마음을 풀어 줄 수도 없고, 술 사 주며 앙금을 삭여 주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후배에게 업무상 지적할 것이 있어도 웬만하면 모른척 하고, 개선하도록 충고를 해 주고 싶어도 입을 다문다. 뒤통수에 대고 손가락질은 할지언정 눈을 맞추고 솔직하게 꾸중은 하지 않는다. 서로 연결되고 나누어서 시너지를 거두기보다 물과 기름처럼 빙빙 겉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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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서로에게 불리하다. 선배는 만년대리 역할을 하는 부장이 되어서도 후배에게 맡길 일을 자기 혼자 다하게 되고, 후배는 프로가 되기 위해 단련하고 훈련하는 과정을 상실한 채 입사 1년차가 됐는데도 여태 적응을 못하고 이직을 고민한다. 상대방의 무덤을 서로가 파 주고 있는 격이다. 조직이 발전하고 구성원이 성장하려면 선배의 따스한 꾸중과 후배의 받아들이는 마음이 필요하다. 둘 다 필요하지만 윗물이 아래로 흐르듯 선배의 배려가 먼저다. 후배에게서 퉁겨 나오는 꾸중 대신 스며들 수 있는 꾸지람을 개발해 보자.

건강한 꾸중이란 지적해서 혼내는 게 아니라 가르치는 것이다. 그를 잘 알고 아끼는 사람이 그에게 느낌을 말하고 아쉬운 부분을 일러 주는 것이다. 꾸중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말하는가가 더 중요하다. 선배가 꾸중을 할 때 보이는 감정은 후배의 감각을 왜곡시키기 때문이다.

“머리가 장식이냐?”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그것도 아이디어라고 내놓냐?” 이 친구 정말 안 되겠네.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내가 몇 번을 얘기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하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그렇게 할 거면 집어치워”와 같은 표현은 선배가 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사라지고 감정만 남는다. 후배 입장에선 꾸중이 아니라 화풀이로 느껴진다. 아무리 옳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말 속에 화가 섞이면 그 진의가 흐려지고 가치가 사라진다.

말에는 감정과 메시지가 함께 실린다. 문제는 메시지보다 감정이 더 세다는 것이다. 부정 메시지에 긍정의 감정을 담아 말하면 긍정이 남고, 긍정 메시지에 부정의 감정을 담아 말하면 부정이 남는다. “수고 많았는데 고생스럽겠지만 이 보고서는 다시 써야겠어. 근거 자료가 미흡해. 오늘 야근을 해서라도 끝내야겠는데 가능할까?”라고 부정 메시지에 긍정의 감정을 담아 말하면 후배는 긍정의 감정으로 쓸 마음이 생긴다. 반면에 “왠일이야? 오늘 보고서는 좋네. 직접 쓴 건지 안 믿기지만 보고서는 다 끝냈으니 오늘은 그만 퇴근해”라고 긍정 메시지에 부정의 감정을 담아 말하면 후배의 마음은 퇴근하면서도 찜찜하다.

그래서 꾸중을 할 때 정말 준비해야 할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감정이다. 후배에 대한 한심함과 화가 서려 있으면 메시지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후배에게 가 닿지 않는다. 꾸중을 하더라도 자신의 불편과 짜증을 뛰어넘어 후배를 위한 애정과 기대를 담아서 해야 한다.

곰곰히 되돌이켜보면 선배의 짜증과 실망은 지식의 저주일지 모른다. 1990년 미국 스탠퍼드대 엘리자베스 뉴턴(Elizabeth Newton)은 '지식의 저주'를 실험했다. 자신에게 익숙한 유행가 리듬을 자기 짝에게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려 들려주고 짝이 노래 제목을 맞힐지를 예상하는 실험이었다. 리듬을 친 그룹은 당연히 맞힐 것이라 예상했지만 실제로 리듬을 들은 그룹은 노래 제목을 예상만큼 맞히지 못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반응을 예상할 때,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다른 사람도 알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매몰돼 나타나는 인식의 왜곡(cognitive bias)이다. 선배에겐 익숙하고 당연한 지식이 후배에게는 생소하고 어려운 일일 수 있다. 선배의 '지식의 저주'가 후배의 실수에 대해 화와 노여움, 짜증과 실망스러움을 부추긴다. 개구리는 올챙이적을 생각하지 못하지만 사람은 개구리가 아니다. 선배는 자신의 후배시절을 기억해내야 하고 후배의 입장에 서서 어떻게 꾸중을 해야 후배에게 효과적일지를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다. 그래서 선배 아닌가? 선배는 후배시절을 되돌이키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건설적인 지적을 연습하자.

“내가 겪은 번거로움도 번거로움이지만 앞으로 **님에게 이런 일이 또 생길까 염려스러워, **님이 직장생활을 잘할 수 있기를 바래서 하는 말이야. 오늘의 실수를 통해서 뭘 배웠는지 알 수 있을까?? 앞으로 뭘 주의할 계획이야? 내가 지원해야 할게 있을까? 내가 추천하는 방법이 있는데 해볼래? 회사에서 준수해야 할 것은 이것이야. 나는 이렇게 하니까 효과가 있었어. 나라면 이렇게 할 것 같아. 그게 **님을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꼭 지켜졌으면 좋겠어. 약속해 줄 수 있어? 이러면서 배우는 거고 이러면서 나아지는 거야. **님을 특별히 기대하고 믿고 있어서 하는 말이야”라는 표현을 추천한다. 닭살이 돋는가? 내가 안해본 것은 현실감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경험하고 나면 그건 현실이 된다. 선배의 불편과 번거로움을 화풀이하기 위해 혼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의 앞날을 위해서 지적을 하자. 피드백은 자주 솔직한 방식으로 철저하게 해야 한다. 단호하게 잘못된 행동을 알려야 하고 꾸준히 직접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선배가 진정 내려놓고 포기해야 할 것은 후배 자체가 아니라 후배에 대한 화와 노여움이다.

지윤정 윌토피아 대표이사 toptmr@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