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와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가 일본 정부의 핵심 소재 수출 규제 가능성을 예상해 대비책을 마련해 온 것으로 파악됐다. 일부 소재는 수급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는 방안을 확보했다. 이와 함께 핵심 소재를 국내에서 직접 생산하기 위한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 핵심 산업인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겨냥한 일본의 경제 보복 카드 여파를 최소화할 수 있을 지 주목된다. 또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일본 소재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져 '탈(脫) 일본 소재' 움직임이 가속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2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 및 소재 업계는 일본에서 불화수소(불산) 수출이 중단될 가능성에 대비, 대책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사안에 정통한 업계 관계자는 “일본 정부가 한국과의 외교 관계 악화로 지난해부터 불화수소 공급 중단 가능성을 언급, 국내 대기업이 다른 수급 경로를 확보한 것으로 안다”면서 “일본에서의 수출 중단을 고려, 대만에서 불화수소를 공급 받기로 한 상황”이라고 전했다.
불화수소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 쓰이는 핵심 소재다. 금이나 백금을 제외한 금속 대부분을 녹일 정도로 부식성이 강해 실리콘 웨이퍼 불순물 제거에 활용된다. 불화수소 부족은 곧 반도체 제조 차질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일본 정부는 이를 노리고 1일 수출 규제 대상 품목에 올려놨다.
정부 차원에서도 중장기 대책을 마련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부 소재는 국내에 공장을 짓는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일본 수출 규제와 관련해 지난해부터 준비를 해 왔다”면서 “시간이 좀 더 걸리겠지만 일부 품목은 국산화를 위해 공장까지 짓고 있는 것도 있다”고 밝혔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오는 4일부터 불화수소를 포함해 포토레지스트, 불화폴리이미드의 대 한국 수출과 제조 기술 이전에 대해 포괄적 수출 허가제도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밝혔다. 기존에는 허가 신청 면제 등의 우대 조치를 취했지만 앞으로는 수출 때 건마다 심사하겠다는 것이다.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일본 소재 수출을 통제, 우리 정부를 압박하겠다는 의도다.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수소는 주로 반도체 제조에 쓰이는 소재고, 불화폴리이미드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액정표시장치(LCD) 등 디스플레이에 활용된다.
그러나 국내 업계가 어느 정도 대책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일본 정부의 한국 대표 산업 옥죄기 규제가 어떤 양상으로 흘러갈 지 주목된다. 반도체 생산 위축이나 지연 등 문제가 최소화될 경우,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등 일본과의 협상 과정에서 우리 정부와 산업계가 버틸 수 있는 시간 및 체력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WTO 제소와 관련해 우리나라가 유리할 것이라는 진단도 나왔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WTO 제소 절차에 들어가면 우리나라에 유리하다”면서 “일본이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특정국, 즉 우리나라만을 겨냥하고 있어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관건은 포토레지스트다. 포토레지스트는 일본 신에쓰, JSR, 스미토모화학 등이 공급하고 있는 가운데 당장은 국산화 또는 대체가 어려운 상황이란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불화폴리이미드는 OLED 등 디스플레이에 쓰이기는 하지만 일부 국산화가 돼 있는 상황이다.
산업통상자원부도 지난 1일 일본의 수출 규제 등 가능한 시나리오에 대비, 업계와 공동 기술개발을 통한 반도체 소재 국산화 등을 추진해 왔다고 밝혔다.
국내 산업계는 대체재 확보와 별도로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일본 소재 확보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 정부가 당장 수출 중단이 아닌 허가 심사를 강화하겠다고 밝힌 만큼 필요한 물량 확보를 위해 미리미리 수출 신청을 독려하고, 재고 쌓기에 집중하고 있다.
일본의 경제 보복을 계기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국산화에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졌다.
반도체 업체 관계자는 “장비와 소재를 포함한 반도체 생태계가 중요한 이유가 다시 확인됐다”면서 “대기업에만 관심을 쏟을 게 아니라 소재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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