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반도체 웨이퍼 업체 SK실트론이 미국 듀폰의 실리콘카바이드(SiC) 웨이퍼 사업을 통째로 인수했다. SiC 웨이퍼는 기존의 실리콘 웨이퍼보다 단단하고 에너지 효율을 약 20% 높일 수 있는 '포스트 실리콘' 소재다. 미국, 일본 등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이 시장에 SK실트론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SK실트론은 미국 듀폰의 SiC 웨이퍼 사업부를 4억5000만달러(약 5400억원)에 인수한다고 10일 밝혔다. SK실트론과 듀폰은 국내외 인허가 승인을 거쳐 올해 안에 인수 절차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현재 반도체업계에서 사용하는 실리콘은 첨단 기기가 요구하는 전압과 방열 등을 견디지 못하지만 SiC로 만든 웨이퍼는 강도가 훨씬 단단하고 소비 전력을 줄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 기존 웨이퍼보다 크기를 약 5분의 1로 줄일 수 있어 정보기술(IT) 기기의 실장 면적을 늘리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SK실트론의 듀폰 SiC 사업부 인수는 국내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큰 전환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듀폰은 독자 생산설비 설계 및 운영 노하우로 미국, 유럽 등 대형 전력반도체 회사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SK실트론이 기술과 설비를 사들이면서 관련 기술 '국산화'에 더욱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국내 반도체 소재 산업 전반에 걸친 경쟁력 강화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구상모 광운대 교수는 “SiC 구현을 하려면 앞으로도 시간이 필요하지만 한국이 향후 소자·모듈 경쟁에서 미국 및 일본 업체와 맞설 수 있다는 점에서 희소식”이라고 분석했다.
앞으로 SK실트론은 미국 현지 연구개발(R&D) 및 생산 시설을 강화하면서 SiC 웨이퍼 시장에 대응해 나갈 계획이다.
SK실트론 관계자는 “SK실트론 제조 기술 역량을 접목해 공정 최적화 및 생산성 개선에 나설 계획”이라면서 “향후 적시 투자를 통해 경쟁력을 확보하고 기업 가치를 지속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말했다.
SiC 웨이퍼는 전기차 시장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전기차에는 60~80개 전력 반도체가 탑재된다. 극한의 환경에서도 안전을 유지하면서 달려야 하는 자동차 전장 장치용으로 제격이다. 최근 미국 테슬라를 비롯해 국내외 완성차 업체들이 전기차 생산량을 늘리면서 SiC를 활용한 전력 반도체 연구에 뛰어들었다.
전력 반도체 활용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SiC 웨이퍼를 활용한 전력반도체 시장 규모는 올해 13억달러에서 2025년 52억달러로 급증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한 업계 전문가는 “전기차뿐만 아니라 항공·우주 산업에서도 필수로 활용될 분야”라고 전했다.
SiC 웨이퍼를 양산할 수 있는 회사는 미국 듀폰을 비롯해 크리 자회사 울프스피드와 일본 쇼와덴코, 덴소, 스미토모 등이다. 그러나 현재 기술로는 웨이퍼를 만들기 전 커다란 기둥인 잉곳을 6㎝ 높이 안팎으로만 제작할 수 있어 생산량이 적다. 최근 수요가 폭증,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까닭이기도 하다.
미국, 일본, 유럽 회사들은 이미 SiC 확보 및 R&D 경쟁을 시작했다. 지난 5월 크리는 SiC 개발을 늘리기 위해 2024년까지 1조1000억원을 쏟아붓기로 했고, 반도체 제조업체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는 올해 스웨덴 SiC 웨이퍼 업체 노스텔의 지분 55%를 인수했다. 톈커블루 등 중국의 파상공세도 만만찮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SiC 웨이퍼 R&D는 뒤처져 있다는 평가가 많았다. 미국과 일본 SiC 업체들이 자국 기업 위주의 웨이퍼 공급을 한다면 후순위로 밀린 국내 소자 업체들이 가격 경쟁력과 품질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것이란 전망까지 있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계열화가 잘된 일본은 자국 업체들과 협력해 이미 신칸센 등 다양한 기기에 적용되고 있다”고 말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