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금융권이 대규모 생체인증 도입에 나섰지만 독자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 기업은 외면받고 있다. 일본 기업이 원천 기술을 보유한 '정맥인증' 기술 도입만을 고수하고 있어 사업 기회조차 없다는 하소연이 줄을 잇고 있다. 심지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은행의 일본 기술 도입 및 기술확산 금지' 청원까지 등장했다. 국내 생체인식 기업 기술은 조달등록 등 일부 정부 부처 서비스에 채택돼 있다. 그러나 일부 시중은행은 객관적인 기술 검증과 편의성 조사를 통한 생체(정맥)인증 기술 선택이 불가피한 입장이다.
5일 정보통신(IT)·금융권에 따르면 국내 주요 은행의 현금자동입출금기(ATM)와 디지털 키오스크 등으로 생체인증 기술 도입이 확산되고 있다. 공인인증서를 대체할 새로운 인증 수단으로 떠올랐다. 보안업계는 홍채, 지문, 얼굴 등 비용이 저렴하고 보안성 높은 생체인증 기술을 은행권이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관공서나 공공기관과 달리 공정한 입찰이나 기술 개방 비교 테스트 없이 정맥인증 기술을 도입, 일본 기업에 비싼 라이선스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공정한 기술 비교 없이 입찰 기회까지 주지 않는 건 역차별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국내 지문인증 기술 기업 관계자는 “생체인증 기술 각각의 장단점이 있고 고객 선호도별로 다를 수 있는 건 잘 알고 있다”면서 “그러나 공항이나 공공기관 등에서는 사용자 선호도를 고려해 지문, 얼굴, 정맥 등 다양한 생체인식 기술을 모두 접목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홍채인증 기술 기업 관계자는 “정부 생체인증 진흥에 맞춰 금융결제원의 분산관리시스템에도 다양한 생체인증 기술이 포함됐지만 대형 은행은 일본 기술 의존도가 높은 손바닥 정맥과 손가락 정맥 기술만을 채용하고 있어 한국 기업은 시장 참여 기회가 없는 상황”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맥인증 기술은 일본 원천 기술로, 일본 기업들이 독점 공급하고 있다. 특정 기업이 대다수 은행권에 제품을 납품하는 상황으로 기술 의존도가 높고, 상당한 라이선스 사용료를 받고 있다. 문제는 지난해 일본의 불화수소 수출 규제와 같은 상황이 금융권에 발생할 경우다. 국내 보안업계는 향후 사후관리 측면에서도 해외 의존도를 낮출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했다.
은행권의 경우 생체정보를 통해 입금 또는 이체하거나 개인정보 등이 필요한 업무를 처리하고 있어 해외 특정 기업 기술만 고집할 경우 사후관리에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있다. 이 때문에 생체인증 기술 도입 시 부품·소재처럼 국산화가 필요한 실정이다.
시중은행은 정맥인증 기술을 선탑재한 것은 공정한 프로세스라고 설명했다.
한 시중은행 디지털채널 관계자는 “사후관리나 보안사고 등이 발생했을 때 이를 책임질 수 있는 신뢰성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서 “일본 독자 기술임을 알고 있지만 은행권의 여러 상황을 고려했고, 정맥인증 보안성 등을 모두 검수했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편 지난해 8월에는 청와대 청원을 통해 금융권의 일본 기술 도입을 막아 달라는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청원인은 “정맥인증 기술을 도입하고 있는 기업 가운데 한 곳은 100% 일본 지분으로 운영되고 있는 회사다. 또 다른 청원인은 51% 일본 지분에 포함되는 그룹 계열사의 한국 진출 회사”라고 주장했다.
이 청원인은 국민이 돈을 입금·이체하거나 통장을 만들 때, 자기 신분을 확인할 때 일본 원천 기술 제품을 사용한다는 것이어서 정부가 이를 면밀하게 검토할 것을 요구했다.
길재식기자 osolgil@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