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기연구원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응해 전기에너지 기반 '무결점 전기기술(the Absolute E-technology)'을 미래 전략 연구 키워드로 설정했다.
한국전기연구원(KERI·원장 최규하)은 4월 10일 전기의 날 55주년을 계기로 KERI 중장기 연구개발(R&D) 방향을 '무결점 전기기술 확보'로 잡고, 내외 역량을 결집해 정부출연연구기관의 롤모델을 제시한다는 방침이다.
무결점 전기기술은 에너지, 환경, 초연결 등 현대사회 주요 이슈와 당면 문제, 요구 등을 완벽하게 해결하면서도 부작용(결점)이 없는 기술을 말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넘어 5차, 6차 산업혁명까지 염두에 둔 미래기술이자 목표다.
◇4차 산업혁명과 전기화 시대 대응
KERI는 수년 전 4차 산업혁명과 기술이 이슈로 떠올랐을 때부터 '전기화(Electrification) 시대'를 기치로 지능형 전기기술, 환경친화 전기기술 파워클리닉스 등 전기에너지를 기반으로 한 미래기술 개발을 기획해왔다. 무결점 전기기술은 이러한 연구기획과 미래 전략의 완성판이다.
KERI 무결점 전기기술은 기존 산업에 혁신성을 불어넣는 '선도기술'과 기존 신기술과 접목해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할 '확장기술'로 구분된다.
선도기술은 '신축유연전극', 지능전기 기반 '스마트팩토리' '레일건' '전자농장(E-Farm)' 등 소재 분야에서 국방, 농업, 일반 제조까지 해당 산업을 고도화하고 새로운 가치를 발굴할 수 있는 기술이다.
소재 분야는 탄소나노소재를 이용한 신축유연전극을 개발, 차세대 웨어러블 전기·전자기기에 접목한다. KERI 보유 전기기술에 나노, 3D프린팅 등 최신 기술을 융합해 나노미터 크기의 전도성 스마트기기 전자회로를 인쇄할 수 있는 전극 개발이 목표다. 신축유연전극을 로봇에 적용하면 새로운 차원의 말랑말랑한 소프트로봇을 만들 수도 있다.
국방 분야는 전자기파(EMP) 공격을 막는 EMP 차단 기술, 화약을 쓰지 않는 레일건 등을 R&D 과제로 추진해 방산에 적용해 나간다.
농업 분야는 첨단 플라즈마와 정보통신기술(ICT) 기반 제어기술을 활용해 고생산성에 고효율을 지닌 전자농장을 구현한다. 식물공장보다 진일보한 미래형 농업 모델이다.
제조혁신 키워드로 등장한 스마트팩토리는 인공지능(AI), 로봇 기술을 연계한 '지능전기 기반 스마트팩토리'를 개발, 품질과 비용 개선 등 생산성을 넘어 산업 현장의 안전과 환경문제까지 해결한다.
확장기술은 현재 주목받고 있는 신산업 및 신기술과 접목해 새로운 역할과 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는 전기응용기술이다. 친환경 수송기기와 전기 의료기기가 무결점 전기기술이 필요한 대표 확장기술 적용 분야로 꼽힌다.
KERI는 친환경 수송기기 '플라잉카' 개발에 시동을 걸었다. 추진시스템을 비롯해 주요 핵심기술 개발에 내년까지 25억원을 투입한다. KERI 플라잉카는 고출력 전동기와 이중화 구동시스템을 갖춘, 지상과 공중에서 동시에 사용 가능한 듀얼모드 플라잉카다. 단거리 이동에는 자율주행차 기능을, 장거리 이동 때는 소형 비행기 기능을 수행한다.
친환경 전기선박도 개발한다. 이미 선박용 전기추진 핵심기술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전기추진 선박을 육상에서 시험할 수 있는 'LBTS'를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계 3번째로 구축했다.
전기의료기기는 전기공학자가 주도하는 헬스케어 시대를 비전으로 전기기술 기반 첨단 의료기기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초미세 펨토초 레이저를 활용한 정밀 치료, 형광기술을 이용한 췌장암 치료와 진단, 난청인을 위한 스마트 보청기, 유방암 조기 진단, 암치료기용 고에너지 전자빔 등이다.
최근에는 코로나19에 대응할 수 있는 귓속형 생체신호 모니터링 기술을 비롯해 AI 융합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 개발도 중장기 과제로 검토하고 있다.
◇전력산업 발전과 글로벌 경쟁력 견인
다소 무모해 보이기도 하는 무결점 전기기술 개발은 40년 이상 전기와 전기에너지 분야에서 거둔 세계적인 R&D 성과와 축적된 자신감이 배경으로 작용했다.
KERI는 1976년 설립 이후 44년 동안 '전력의 안정적 공급'을 미션으로 국가 전기전력산업 발전과 경쟁력 향상을 지원해왔다.
765㎸ 초고압 전력설비 국산화는 KERI 10대 연구성과이자 국내 전력산업 경쟁력을 한단계 끌어올린 대표 성과로 꼽힌다. KERI는 기존 수평배열 1회선 설비보다 두 배 이상 전력전송 효율을 높인 수직배열 3상 2회선 송전선로 기술을 세계 최초 개발했다. 이 기술을 적용한 765㎸ 초고압 전력설비는 동일한 송전탑 설치 면적에서 장거리·대용량 전력 전송 능력이 기존 345㎸ 대비 5배나 높다. 초고압 전력기기, 송전 기자재와 송전선로 친환경기술 등 한국형 초고압 송전계통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대중공업, 효성중공업, 한전 등 민간기업과 협력해 세계 두 번째로 개발한 800㎸급 가스절연 변전소(스위치기어, GIS)도 세계적인 성과다. 현대와 효성은 중국과 동남아에 800㎸ GIS 수출에 성공했고,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최고 전압인 1100㎸ GIS까지 만드는 국가 반열에 올랐다.
한국형 배전자동화시스템(KODAS)과 차세대 에너지관리시스템(EMS)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KODAS는 개폐기와 선로 정보를 상시 수집하고 감시해 배전계통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전력 공급 신뢰도를 높여주는 기술이다. KODAS 개발은 정전시간 단축, 고장 탐색과 수리시간 단축 등 배전계통 안전성은 물론 수용가 전력품질 향상과 안정화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차세대 EMS는 국가 전체 전력계통을 컨트롤하는 두뇌 역할을 하는 기술로 전력공급을 24시간 계획하고, 실시간 운영·관리하며 대정전을 예방한다.
원전의 두뇌이자 신경 조직으로 열출력 제어를 비롯해 원전 상태를 감시하고 보호해 고장을 최소화하는 '원전 제어계측시스템', 발전기 출력전압을 제어하는 '발전기 여자제어시스템' 등은 국산화를 통해 해외 의존을 탈피했고, 신속한 유지보수 능력 확보로 원전을 포함한 발전소 효율 향상에 기여한 대표 R&D 성과다.
R&D와 함께 KERI 역할의 또 다른 축은 전력기기 시험인증이다.
KERI는 대전력, 고전압 등 가혹한 조건에서 전력기기가 문제없이 작동하는지 엄격하게 시험하고, 성적서나 인증서를 발급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이와 관련 세계단락시험협의체(STL) 정회원 자격 획득은 시험인증 분야의 글로벌 성과다. STL 정회원 자격 획득으로 국내 전력기기 업체는 시험인증에 드는 운송비, 시험료 등을 절감하고 수출경쟁력도 높일 수 있게 됐다. KERI는 STL 정회원 자격으로 국내 전력기기업계의 각종 의견 및 애로사항을 STL에 적극 개진한다.
시험인증 분야 KERI의 경쟁력은 환태평양 1위, 세계에서는 이탈리아 CESI와 함께 최고 수준의 국제 공인 시험인증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 지역사회와 동반 성장 미션
지역과 상생 발전은 KERI의 또 다른 현안이다.
세계 수준의 다양한 성과를 보유하고 첨단 기술개발을 지속 추진하면서도 정작 이러한 성과를 활용해 지역사회와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부분은 소홀했다는 평가도 없지 않다. 경남 창원에 본원을, 안산과 광주에 분원을 두고 있다는 인지도는 지역사회에 잘 알려져 있지만 존재감은 그리 높지 않다. KERI가 지난해 창원시와 협력해 '경남창원 강소연구개발특구' 육성에 나선 배경이다.
KERI와 창원시는 강소특구를 기반으로 KERI 보유 우수기술을 지역 산업계에 전파해 침체한 창원 기계산업을 지능형 전기기계산업으로 재도약시키고,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어울리는 미래먹거리를 창출할 계획이다.
KERI는 강소특구 육성과 활성화를 위해 캐나다 워털루대학과 AI공동연구실을 강소특구에 설립한다. 워털루대 제조AI 기술과 KERI 지능전기기술을 창원 기업에 이전해 무결점 전기기술 사업화 모델을 만들고, 이를 경남과 전국으로 확산한다는 계획이다.
경남창원스마트산단과 '공정혁신 시뮬레이션센터'도 구축하고 있다. 센터 구축과 운영으로 중소기업을 지원하고, 현장 실무능력을 갖춘 고급 전문인력을 양성해 공급한다.
지난해 연구원 설립 이후 처음으로 자체 기술이전 및 신기술 발굴 행사인 KERI 테크페어(KETFA)를 마련, 격년으로 개최한다.
올해는 새로이 지역협력 성과의 질을 높이기 위해 '테스트플랜트 구축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테스트플랜트는 기존 테스트베드에서 1차 검증한 기술이나 제품의 성능, 효과를 상용화 수준으로 테스트해 완성하고, 신뢰성을 검증하는 시스템(설비)이다. KERI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맞춤형으로 완성형까지 개발 지원하고, 이로써 기술 상용화의 실질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사업이라 판단하고 있다.
창원=임동식기자 dslim@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