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승과 제자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하는 도제식 교육
스승의 그림자를 밟는 것 조차도 허가되지 않던 시대가 있었다.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있는 '스승의 은혜'라는 노래의 가사에는 스승의 은혜가 하늘과 같고 스승이 마음의 어버이 시라고 했다. 태산같이 무겁고 바다보다 더 깊다는 스승의 사랑을 요즘 어린이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만큼 '스승과 제자'라는 의미가 상당히 퇴색되어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무척이나 씁쓸한 일이다. 가르침을 얻기 위해 스승의 밑에서 공부나 수련을 하는 제자를 '도제'라고 하는데 도제식의 가르침 역시도 현대에는 '열정페이'라는 일부 악용의 사례로 인해 터부시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붓으로 글씨를 쓰는 '서예'는 고대 중국에서 발달되어 한자를 사용하는 아시아 권역의 여러 나라에서 계승된 유구한 역사를 가진 예술 장르이고 앞서 언급한 도제 형태로 그 명맥이 이어져왔다.
보고 따라 그려내는 식으로 흉내만 내어서는 그 전통이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서예의 영역은 다른 장르에 비해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엄격하고 철저한 편에 속한다. 처음 '사제동행' 전시에 대해 접했을 때 스쳤던 생각이 이러한 것들이었다. 서예와 관련된 전시인데 스승과 제자가 동등한 위치에서 참여를 한다는 것 자체가 놀랍고 신기했다.
◇ 의정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고 있는 '사제동행(師弟同行)' 전시
너무 궁금한 나머지 전시장을 찾았고 운 좋게 제자인 지석 최진형 작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1997년 처음 스승인 공재 진영근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서예와 전각을 배웠다고 이야기하는 내내 스승님의 가르침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그였다.
스승 진영근은 이전에도 인사동 일대에서 제자들과 여러 차례 전시를 진행했고, 제자 최진형 역시 그 전시들을 함께 했다고 한다. 이번 전시가 제자와의 첫 전시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스승인 공재 지영근은 우리나라 서예 및 전각 분야의 한 획을 그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제자들과 격의 없이 공동의 전시를 주최할 수 있는 스승이 몇이나 될까 싶다. 그것도 서예 분야에서 말이다. 거기에 의정부문화재단 산하 예술의전당이라는 권위 있는 공간에서의 전시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가 또 다른 의문으로 돌아왔다.
이번 전시가 가능했던 것은 의정부문화재단의 이사장이자 현 의정부시장인 안병용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안병용 의정부시장은 평소 스승 진영근의 작품에 관심이 많았고 이전 전시들도 자주 관람할 정도로 각별했다고 한다. 그러한 안병용 시장이 스승과 제자에게 예술의전당 전시장에서 전시를 하자고 제안했고 덕분에 '사제동행'전이 개최될 수 있었다.
전시 타이틀인 '사제동행'도 안 시장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전시를 제안받았던 당시에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도 살짝 주춤하던 시기여서 안병용 시장의 적극적인 추진에 준비를 시작했는데 다시 상황이 심각해져 안타깝다는 마음도 전했다.
지인들을 초대하는 것도 망설여지더라는 최진형 작가의 말속에서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전시장을 영상으로 촬영해 본 적은 없었는데 시국이 시국 인터라 이번 전시를 영상으로 남기려고 한다는 이야기도 더했다. 의정부문화재단 유튜브 채널 등을 통해 공개될 예정이라 어떠한 결과물이 나올지 기대된다는 소감도 밝혔다.
◇ 스승과 제자의 동행. 어찌 보면 파격적인 그들의 행보
'사제동행(師弟同行)' 전시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여느 서예 전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작품의 면면을 살펴보면 서예의 영역에서 틀을 깨고 트렌디한 시도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글자가 빼곡히 담긴 작품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작품들에 비해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작품들의 낙관이 인상적이었다. 단순히 작가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작품 마다마다의 개성을 낙관이 담아내어 주는 역할을 했다.
전시장 구석구석 수백 개에 달하는 낙관으로 사용된 전각 작품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커다란 크기의 돌로 된 전각 작품들은 양각과 음각을 가리지 않고 알맞은 기법으로 만들어진 듯 보였다. 나무를 재료로 한 전각 작업은 나무의 결이 쪼개지기 쉬워 내공이 쌓여있지 않으면 완성품을 만들기 어렵다던데 나무로 만들어진 전각 작품도 두어 개 발견할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작품의 설명을 위해 옆에 배치되는 주석에 여러 가지 정보를 담았다는 것이다. '사제동행(師弟同行)'의 스승을 뜻하는 '사(師)'자의 색이 다르면 스승 진영근의 작품이고 제자를 뜻하는 '제(弟)'자의 색이 다르면 제자 최진형의 작품이다. 작품의 가격까지 친절하게 숫자로 표기되어 있다.
보통의 서예가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모던한 스타일의 작품들도 눈길을 끈다. 낙관 형태의 전각 작품뿐 아니라 알록달록한 액자 소품처럼 보이는 작품들도 다수로 서예와 전각을 보다 쉽게 이해하고 접할 수 있게 한 부분도 괄목할 만한 점이었다.
세계 홍차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무이산 정산소종'의 최고급 홍차인 '금준미'를 직접 내려 전시를 관람하러 와준 고마운 이들에게 대접하는 최진형 작가를 보면서 그의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스승 진영근 선생의 가르침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사제동행(師弟同行)' 전시를 통해 스승과 제자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는 계기가 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전시장을 찾고픈 마음이 굴뚝같은데 전시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전시 '사제동행(師弟同行)'은 오는 15일까지 계속된다.
전자신문인터넷 K-컬처팀 오세정 기자 (tweety@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