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창업한 지 5년도 지나지 않아 2000억원이 넘는 금액으로 인수합병(M&A)을 성사한 창업가를 만났다. 미디어는 그에게 '성공'이라는 왕관을 씌워 주었다. 시끌벅적한 대관식이 끝난 후의 만남이었다. 매각 규모도 컸고, 무엇보다 '엑시트 후'의 좋은 모델이 거의 없는 우리 업계에 바람직한 선례가 될 스토리를 발굴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설렜다. 그러나 그날의 만남은 깊은 공허함만 남겼다.
업계는 그의 행보에 주목했다. 연쇄 창업에 도전하거나 경제적 성공을 바탕으로 해서 투자자로 변신하거나 사회공헌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도 있을 거라는 예측이 많았다. 스타트업 생태계가 성숙한 나라에서는 성공한 안트러프러너들의 행보가 대개 이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도전에 나서지 않았다. 자발적으로 이른 은퇴를 선택한 것이라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삶이겠지만 그보다는 예상치 못한 시기에 벼락부자가 된 이들이 겪는 부작용을 앓고 있었다. 그의 인생 목표는 마치 수중의 돈 자체를 지키는 것인 듯 보였다. 주변을 경계하고, 어렵게 쌓은 인적 네트워크를 스스로 단절했다. 뚜렷한 목표와 계획은 없지만 그렇다고 은퇴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창업 후 고난의 행군을 거듭하던 시기에도 생기를 잃지 않던 눈빛과 여유로움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가 다시 인생에서 추구할 만한 가치를 찾고, 기업가정신을 발휘해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고, 도전을 감행할 수 있을까. 쉽지 않아 보였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원인을 단 한 가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스타트업 여정의 최종 목적지에 성공적으로 도달했으나 정작 이후 삶의 목표와 계획이 전혀 없었다.
기업이 성장하면서 기업가치가 커지고, 큰 금액으로 회사를 매각해서 부자가 되는 건 바람직한 스타트업 생태계 게임의 법칙이자 가장 성공적인 엑시트 유형이다. 그러나 엄청난 돈을 벌었다는 것이 안트러프러너 자신에게 반드시 해피엔딩은 아니다. 실제로 경제적 성공을 거둔 안트러프러너 가운데에는 회사 매각을 후회하고 무기력과 우울증세, 정체성 상실로 오랫동안 고통을 받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안트러프러너들이 미래를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온갖 어려움을 극복해 낼 수 있는 까닭은 성공의 결과가 곧 행복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현장에서 만난 다수의 안트러프러너와 예비 창업가들은 '창업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본질에서 벗어난 답이다. 성공이 창업 목표가 되려면 어떤 성공을 원하고 미래의 삶에 왜 그런 성공이 필요한지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부자가 목표라면 부자가 된 후 많은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계획하는 것이 순서다.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역시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구체적 삶의 모습을 그려 놓아야 한다.
스타트업의 여정은 한 편의 게임과 같다. 모든 게임은 반드시 끝이 있다. 게임을 무사히 끝내면 다음 단계의 게임을 시작하거나 새로운 게임에 도전할 수 있다. 스타트업 게임의 시작은 창업이고, 끝은 엑시트다. 게임을 시작한 모든 기업은 엑시트를 향해 전력 질주해야 한다. 하지만 엑시트 후를 계획하지 않은 전력 질주의 끝은 결과가 어떻든 안트러프러너 자신에게 긍정적이지 않다. 게임에서 여러 번 실패할 수 있으나 정작 고통의 크기는 실패 횟수보다 어떤 실패인가에 따라 좌우된다. 어렵게 성공할 수 있으나 어떤 성공인가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 목표 달성 이후 방향을 잃은 안트러프러너, 특히 성취한 부의 규모가 클수록 안트러프러너 개인의 삶에 미치는 후유증은 생각보다 매우 크다.
에베레스트 정복을 꿈꾸는 산악인의 목표는 당연히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 정상을 정복하면 등반은 일단 성공이다. 그러나 최정상에 깃대를 꽂아도 등반은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무사히 산 아래로 내려와야만 한다. 산악인 엄홍길 대장은 산 가운데 가장 어려운 산은 '하산'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모두가 정상 정복에 환호하지만 실제로 등반은 정상 정복 이후가 더 중요하고, 어렵다는 의미다. 따라서 노련한 산악인일수록 치밀하게 계산된 하산 계획을 준비한다. 정상 정복은 등반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지만 무사 귀환을 하지 못하면 산악인은 영원히 다음 산에 오를 수 없다.
비즈니스도 이와 같다. 등반의 성공이 정상 정복으로 결정되듯 스타트업의 성공 여부는 엑시트로 결정된다. 성공적인 엑시트는 주로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하나는 매각을 통해 경제적 성공을 이뤄서 게임을 끝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장(IPO)해서 투자자들은 자금을 회수하고 안트러프러너는 경영자로서 더 큰 성장을 해 나가는 것이다. 매각이든 상장이든 엑시트에 성공하지 못하면 좀비가 되거나 파산 또는 청산된다.
비즈니스 모델을 성공적으로 키운 안트러프러너는 높은 기업가치로 보상을 충분히 받고, 임직원을 비롯한 거래처 등 모든 이해 관계자도 합당한 보상을 받는 것이 '행복한' 성공이다. 이 과정을 통해 안트러프러너는 성취감으로 충만해지고,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그러나 나쁜 엑시트는 이와 반대다. 안트러프러너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지 않거나 함께 고생한 동료들이 실직하게 된다. 안트러프러너 혼자 엑시트에 대한 모든 공치사를 하고 함께한 주변인들에게는 어떤 보상도 없다. 축하는커녕 손가락질받으며 야반도주하듯 떠난다. 공들여 키운 기업이 결국 파괴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안트러프러너는 정체성을 잃고 과도한 상실감으로 고통을 받는다. 실패한 엑시트다.
행복한 결말은 비즈니스 초기부터 미리 고민하고 전략을 준비했을 때 이룰 확률이 높다. 세계적인 경영 구루들이 이구동성으로 “사업의 성공은 끝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는 까닭은 '최종 목표'가 명확해야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경영 방향을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돈을 많이 번 나쁜 성공이 아니라 모두의 찬사를 받을 수 있는 아름다운 성공을 기원한다.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장 hsryou60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