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주 공공기관 국산 장비 우선구매를 골자로 한 ‘네트워크산업 상생발전 실천방안’을 발표한 지 일주일도 안 돼 일부 기관이 정보화 사업에 앞서 특정 외산 업체에만 유리한 조건과 규격을 담은 사전규격을 공지해 논란이 일고 있다.
공공기관의 ‘스펙 알박기’는 정부가 외치는 ‘상생’을 위해 반드시 사라져야 할 관행인데도 여전히 불공정 입찰이 이뤄진다는 지적이다.
18일 네트워크 업계에 따르면 경찰청이 추진하는 ‘초고속 광대역 통합망 구축’ 사업에서 경기지방경찰청이 시스코 등 외산 업체만 입찰 가능한 사전규격 RFP를 공지했다. RFP는 외산 제품과의 연동을 거론하며 다른 업체는 경쟁이 불가능하게 규격을 못 박았다. 대형 국산업체도 일부 독소조항 때문에 제안이 어려운 상황이다.
RFP에는 ‘경기경찰청 종합정보망 네트워크 접속 장비는 경찰청(본청) 연동 라우터(C7604)와 완벽한 호환성을 유지하도록 제공하여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어 ‘신규 라우터, 백본스위치, 워크 그룹스위치, 직속기관 등의 스위치는 제안 장비 간 완벽한 연동, 효율적 운영, 신속한 장애처리가 될 수 있도록 동일 제조사 장비로 제안하여야 한다’고 적시했다.
논란이 되는 것은 ‘C7604와 완벽한 호환성’과 ‘동일 제조사 장비로 제안’ 부분이다. C7604는 시스코 제품이다. 시스코 제품과 완벽히 호환이 돼야 한다는 것은 시스코 제품의 모든 기능이 제공돼야 한다는 의미다. 회사 제품마다 고유 기능이 있기 때문에 다른 업체는 제안이 어렵다는 설명이다. 동일 제조사 장비도 결국은 시스코 제품을 의미한다.
스위치뿐만 아니라 전송장비에서도 문제점이 지적된다. RFP에는 ‘전송장비는 다양한 시스템과 연동을 위해 한 장비 내에서 PDH, 100/1000Mbps 이더넷, FC신호를 수용하고’라는 내용이 담겼다. ‘FC신호’는 전송장비를 서버, 스토리지와 직접 연결하는 기술이다. 화웨이와 알카텔루슨트에만 있어 국산 업체는 제안이 어렵다.
국산 전송장비 업계는 “사전규격에 제시된 FC신호 등 몇몇 기술은 현재 지방경찰청에서 사용되지 않고 국산 업체는 지원하는 않는 규격으로 국산 제조사가 배제된 상황”이라며 “상생을 강조하는 ICT 정부시책에 반하기 때문에 입찰공고를 즉각 중지하고 사전규격 취소와 재공고를 강력하게 요청한다”고 반발했다.
경기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재작년 본청에서 본청 시스템과 연동이 돼야 한다는 지침이 내려왔기 때문에 이런 내용이 반영된 것 같다”며 “사전규격 공개 기간이기 때문에 여러 의견을 듣고 공정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충분히 반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조달청을 통해 정식 이의제기가 오면 협의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공공기관의 정보화 사업 스펙 알박기는 오래된 관행이다. 지난해 4월 수도권 K지자체는 가상화 사업을 발주하면서 하이퍼바이저 등 특정 가상화 업체만 참여할 수 있도록 RFP를 공지했다. 재작년 완도군은 가상 데스크톱(VDI) 사업을 추진하면서 아예 외산 업체인 VM웨어를 명시해 논란이 일었다.
안호천기자 hca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