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지산업 발자취(2)

전쟁이 끝나고 호남전기가 막 비상의 날개를 펴려고 할때 발생한 사고.

바로호남전기의 설립자이자 초대 사장인 심만택씨의 돌연한 사망이었다.

해방직후 전지제조에 뛰어들어 이 땅에 전지산업의 씨를 뿌렸던 사람. 심만 택씨는 자신이 뿌린 씨가 싹트는 것을 채 보지도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사망으로 호남 전기가 휘청거리고 있을 때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장남 이었던 고 심상하씨였다.

심상하씨는53년 호남전기의 2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그는 20대 초반의패기 넘치는 청년으로 경영에 대한 경험은 없는 상태였다.

심상하씨와동기동창으로 당시 그를 도와 호남전기에서 일했던 K씨의 회고.

"심상하씨는 선친의 유업을 물려받을 당시 조선대 화공과에 다니고 있던 학생신분 이었어요. 부친이 졸지에 유명을 달리 하자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일단 사장직을 맡을 수 밖에 없었지요." 심씨는 그러나 이후 주변인물들의 도움속에 상당한 경영 수완을 발휘 하면서 경영자로서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 나가기 시작했다.

호남전기가망간건전지에 대한 JIS(일본공업표준)규격을 획득(54년) 하고 사내표준화와 품질관리를 도입(60년)한 것 등 당시로선 상당히 앞서 가는 경영 의 모습을 보인 것도 그가 사장으로 재임하던 시절의 일이었다.

이처럼주변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일련의 착실한 경영활동의 결과 심상하 사장이 이끄는 호남전기는 61년엔 미국 군용전지 규격(MIL-B-18C)에 합격 함으로써 주한 미8군에 랜턴 등에 사용되는 B-30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호남전기는또 같은해 통신용 전지 제조방식에 대한 발명특허권을 획득 하고 이듬해인 62년엔 최초로 망간건전지를 미국으로 수출하는 개가를 올리는 등 순조로운 성장가도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결과 호남전기는 5.16 이후 경제발전에 관심을 쏟던 군사정부로부터 호남 의 모범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렇지만주변의 도전도 적지 않았다.

"50년대후반들어 전지산업에 참여하려는 업체들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전지 수요가 많지 않던 때라 다른 업체가 생겨나는 것은 호남전기의 입장에선 상당히 긴장할 만한 일이었지요. 실제로 초기엔 적지않은 타격도 받았구요." K씨의 기억에 따르면 당시 설립됐던 업체는 동양전기.조흥전지. 제일전지 등3개사. 그러나 또다른 사람들의 얘기와 남아있는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활동을 했던 전지업체 수는 호남전기를 포함해 7~8개에 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동차용배터리 생산업체로 구성된 전전지공업 협동조합의 자료에도 회사명 은 남아 있지 않지만 62년 5월 21일, 7개 업체로 구성된 건전지 조합이 설립 됐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당시에 설립됐던 업체들은 호남전기의 상대로 굳건히 서기도 전에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짐으로써 세인들의 기억에 자리 잡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운명을 겪었다.

그만큼당시의 기업경영 여건이 열악했던데다 호남전기의 위치가 확고했다는반증이다. 다만 동양 전기만은 다른 업체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당시 서울 풍납동에 있었던 이 회사는 "제트킹"이라는 상표로 건전지를 제조 하고 있었다.

현재나이 지긋한 분들중엔 이 상표를 기억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을 정도로 동양전지는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으로 호남전기를 바짝 추격하고 있었다.

그러나이 회사도 넘어야 할 산을 다 넘지는 못했다. 수출을 추진 하다 실패 한 것이 이 회사가 좌초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동양전기는그 결과 75년 끝내 경쟁업체였던 호남전기에 인수되고 말았다.

이회사는 이후 호남 전기의 맥을 이은 로케트 전기의 계열사로 탈바꿈해 상호를 로케트정밀로 바꾸고 지금은 건전지 부품등을 생산하는 업체로 계속 활동하고 있지만 "제트킹"이란 상표는 자취를 완전히 감추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