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품산업의 발자취

80년대 초반까지 계속된 경쟁에서 신규 참여업체인 서통이 호남 전기에 승리 를 거둠으로써 양사 경쟁시대는 정착했지만 이 기간동안 서통이 치른 희생도 컸다. 대대적인 광고활동과 판촉활동의 결과 서통은 상당규모의 건전지 시장을 잠식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과중한 비용부담으로 인한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에대해 뭔가 새로운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점차 커지기시작했다. 서통은 호남전기를 향한 공격적인 영업활동에서 한 발짝 물러서 타협을 모색 할 수밖에 없었다.

호남전기로서도이즈음 서통에 직접 맞대응하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을 하고 있던 터라 서통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결국 양사 모두 상대편을 완전히 누를 수 없다면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이를두고 일각에선 서통과 호남전기가 영남과 호남을 근거로 나눠먹기식 영업활동을 하려한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으나 양사는 출혈 경쟁을 지양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것뿐이라고 일축했다.

80년대초반내내 물러설 것 같지 않던 기세로 한판 승부를 벌여온 호남 전기 와 서통은 80년대 중반부터 동반관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한편호남전기와 서통의 경쟁에 세인들의 관심이 쏠려있는 동안 산업 변방에 서 조용히 활동을 시작하고 있던 업체가 있었다. 양양전지가 바로 그회사다.

이회사가 전지산업의 역사에서 거론될 필요가 있는 것은 기업적 성공여부를 떠나서 알칼리 버튼형과 리튬전지를 국내에서 가장 먼저 상품화 했던 업체였기 때문이다.

양양전지를설립한 사람은 호남전기의 초창기 멤버의 한 사람이었던 김용철씨였다. 6.25전쟁직후 조선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당시 막 호남전기의 사장이 된 심상하씨와 동기 동창으로 가깝게 지냈던 인연으로 56년 호남전기에 정식 입사한후 71년 심상하씨가 타계하자 호남전기를 떠났다.

호남전기를떠날 당시 그의 직책은 기술부장. 70년 호남전기의 알카리 전지 개발도 그가 관여했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다.

호남전기를퇴사한후 한 때 서울 강남의 한 지역에서 호남전기의 건전지 대리점을 운영하던 그는 호남 전기 시절의 전지 개발 경험을 활용해 뭔가 이루어보자는 강렬한 욕망을 불태우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대리점운영경험을 통해 그는 덩치 큰 기업과 직접 맞부딪치지 않고 기업을 키워갈 수 있는 방안으로 "틈새시장 전략"을 생각해 냈다.

김용철씨는마침내 78년 대리점 운영권을 동생에게 넘기고 자신은 풍납동의 한 허름한 집을 얻어 "양양전지"라는 팻말을 내걸었다.

가내수공업 형태이나마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전지 제조사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이듬해인79년, 양양은 첫제품을 선보였다. 시계.전자계산기.보청기 등에 사용되는 단추형 알칼리 전지였다.

소요 부품이나 재료중 국내에서 구입할 수 없는 것은 일본에서 수입해 제조 했다. 김용철씨가 단추형 알카리 전지의 상품화를 계획한 것은 두가지 이유에서 였다. 첫째는 그 당시 단추형이 전량 수입되고 있던 터라 국산화가 필요 하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는 단추형이 시장규모가 작아 기존 업체인 호남전기나 서통이 크게 신경써 대응하지 않으리라는 판단때문이었다.

단추형의상품화는 일단 성공작으로 평가됐다.

양양은소비자 시장은 물론 금성.삼성 등에 납품도 독점했다.

이과정에서 정부의 지원이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정부는 양양 전지에 2천만 원가량의 장기 저리 융자를 해주어 개발을 지원하는 한편 개발이 성공한 후엔 단추형을 수입금지 품목으로 지정함으로써 판로확보도 가능케 해주었던것이다. 때문에 단추형의 연간 시장규모가 5억원 미만이었고 갓 태어난 신생업체라는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양양은 착실하게 영업활동을 전개하면서 성장의 가능성을 보이는 것으로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