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취-7

60년대말부터 금성알프스와 삼성전기 양사가 TV등 영상기기 핵심 부품 기술 개발에 나서 생산기술측면에서는 국내 튜너산업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70년대 말부터 80년대초까지는 태봉전자를 비롯, 한국테레비(현 한국전자), 한국마 벨등 다수의 튜너생산 중소기업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중태봉전자가 77년에 라디오(카오디오용)튜너를, 한국전자가 78년말에 일 도시바의 OEM방식으로 컬러 TV용 튜너를, 한국마벨이 82년 카오디오용 매뉴얼 튜너를 각각 생산.공급하면서 튜너업체가 늘어나 춘추전국시대를 맞게된다. 자급자족형태의 생산체제를 갖추고 있던 금성알프스.삼성전기와는 달리 태봉 전자가 전문업체로는 가장 먼저 튜너를 생산하게 된 것은 지금은 고인이된한국테레비 주 설립자인 제일교포 곽태석씨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제일교포인곽씨가 그 당시 일본의 전자산업 발전방향을 간파하고 국내로 전자산업과 부품산업이 일본보다 20년 뒤떨어져 각종 일본기술이 국내 유입될 것이 명확해지자 한국전자 전신인 한국테레비(주)를 설립한데 이어 신한전자 를 비롯, 한륙전자.경인노불.샤니.한국트랜스.한국음향등 부품업체들을 잇따라 세운다.

곽씨는기존 관리자들을 육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문부품업체들의 설립을 후원하면서 부품왕국을 건설하는 와중에 태봉전자의 현 최고 경영자인 김내순를 만나 튜너 전문생산업체가 탄생하기에 이른다.

당시 국내 부품산업 분야에서 대부격인 곽씨는 일본의 선진 기술을 국내로 들여오는데 전력을 기울였으며 각종 제품을 국산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같은곽씨의 후원에 힘입어 설립된 태봉전자는 초창기 카오디오용 메카튜너를 생산,내수시장에 공급할 계획이었으나 당초 예상과는 달리 국내 세트업체들이 깊어진 국산품에 대한 불신의 골로 사용을 기피하면서 초기 2~3년간 고전을 면치 못했다.

태봉전자가카오디오용메카 튜너를 생산 공급할 당시에는 국내 메카 튜너 생산업체는 물론 일본 메카 튜너 주요 업체인 삼미(미쓰미)를 비롯, 상신.니폰에이스사등이 가격을 크게 낮춰 시장 진입을 결사적으로 막았으며 이같은 가격 인하 정책은 8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에따라태봉전자는 본의아니게 외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 다른 업체보다 일찍 국제화 작업에 착수하게 되고 결국에는 국내 오디오 메카 튜너업체들의 생산중단은 물론 일본 경쟁업체들까지 손을 들게 만들어 최후 승리자가 된다그러나 태봉 전자는 이같은 자리를 마련하기 까지는 고난의 역사를 겪게되는데 국내외 경쟁 업체들의 저지와 국내 전자업체들의 불신현상으로 85년도에 연간 매출액이 15만달러정도에 불과했으며 이후 87년에는 노동운동의 본격화 로 구로공단에서 가장 먼저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한국테레비(주)를설립한 곽태석씨는 태봉전자를 설립 토록 지원한 이후 한 국테레비에서 78년12월 일본 도시바의 컬러 TV용 전자식 튜너를 OEM으로 생산하기 위해 생산시설과 생산기술을 도입,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컬러 TV 전자튜너생산에 나선다.

한국테레비(현한국전자)는 일본 도시바 소향(GOMUKAI)공장으로부터 전자 튜너 조립시설 일체를 도입하고 김영각.박노수.신현국.김영호씨등이 일본에서 생산기술 연수를 받아 동월 PH-4타입의 전자 튜너를 1천20대 생산, 도시바에3백20대 인정품을 공급하면서 튜너 사업에 발을 내딛는다.

이당시 금성알프스와 삼성전기는 전자식 컬러TV 튜너 기술개발에 착수함으로써 선진 일본의 기술을 도입해 생산에 들어간 한국테레비의 전문 생산인력 을 넘보는 것은 시대상황으로 볼때 너무나 당연하고 치열했을 것으로 짐작된 다. 금성과 삼성의 자체 수급용 생산시장에서 전문업체가 대거 등장,치열한 경쟁 체제로 들어가는 80년대초에는 국내에서도 컬러 TV방송의 전파가 발사돼 컬 러화시대의 장이 열였으며 기계식에서 전자식으로 전격 전환되는등 다양화시 대에 들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