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국가정책 수립과정

최근들어 과학기술처의 2010년을 향한 과학기술발전 장기계획발표와 상공자 원부의 2005년을 향한 첨단기술산업발전 정책 중간발표를 연이어 접할 기회 가 있었다. 한쪽에는 과학기술분야 전반을 8개 분야로 구분한 진흥 발전방안 이 제시되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핵심산업 9가지에 관한 진흥발전 계획이 수립되어 있었다. 이른바 우리나라 과학기술 및 산업발전에 걸친 장래 이정 표를 설정한 중요한 국가정책들이었다.

이들 발표토론회에서 가장 많이 지적되고 논의된 것은 업무의 중복성이었다.

얼핏살펴보건대 두 부처의 계획은 여러가지 측면에서 중복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대로 차별화돼있으나 막상 실천단계에 들어서면 중복은 피할 수 없고 또한 부처간의 경쟁 또는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많아보였던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타당성이 있으면서도 한편 부처단위의 정책입안자로서는 어쩔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 당사자로서는 그 부처내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포괄적인 정책을 수립했을 것이고 따라서 부처간의 소관업무에 중복이 있는 한 그 정책에서도 중복성을 피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화살을 각 부처의 정책입안자들보다 차라리 중복성을 피할 수 없도록짜여져 있는 제도 및 조직구성에 돌려야할 것 같다.

한편, 이들 정책에서 외형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정책 수립과정에서 또 다른 커다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양쪽의 정책들이 모두 단순 비례관계와 초등적인 추론과정에 입각해서 수립되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전자정보분야를 살펴보면 현황이 이러이러하니, 여기에 저러저러한 조처를 하면 연성장률이 몇퍼센트가 되어 목표연도 2005년에는 일본, 미국, 독일, 프랑스에 이어 제5위를 점하게 된다는 식이다.

얼핏 보면 상당히 논리적인 것 같지만 실제 상황을 감안할 때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주먹구구식 논리이다. 우리나라가 특정 상품에 역점을 두고 외국시장을 확대해 나갈 때에, 상대국과 경쟁국들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을 것인가. 또 그 상품에 관련된 기술들은 매양 순조로이 연구개발되고 핵심부품들 은 차질없이 조달되며, 부족한 기술들의 도입은 견제없이 가능할 것인가. 또한 세계시장의 판도와 무역질서는 앞으로 십여년동안 변화없이 그대로 유지될 것인가. 한편 우리보다 후발주자인 나라들은 장래에도 줄곧 경쟁대상에서 제외되고, 에너지문제, 환경문제, 국가간 분쟁문제등은 아무런 변동없이 그대로 유지될 것인가.

적어도 한 나라의 정책수립과정은 "전쟁게임"과도 같아야 한다. 먼저 우리와상대방의 현황을 상세히 파악하고 우리의 행동이 불러 일으킬 상대방들의 대응을 다각적으로 분석 검토하고 제3의 요인에 의한 변화 가능성을 점검하는 등, 전체과정을 주도면밀하게 그리고 단계적으로 검토분석한 후에 최선의 방책으로 부각되는 바를 국가정책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 병력이 이 정도이고 상대방은 저 정도이니 우리가 병력을 이정도 증강시킨다면 상대국 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는 식의 단순비례 관계 논리로서 전쟁에 임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한 나라의 국가정책수립을 이러한 초등적 추론과정에 의존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의 정부부처가 수립하는 과학기술정책과 관련 산업정책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먼저 총괄부처가 선정되고 그 휘하의 여타 관련부처의 산업정책입안자들이 결집하여 하나의 국가기술 및 산업정책 팀을 구성한다. 그 팀은 안전기획부, 종합무역상사, 해외공관 등의 지원을 받아 강력한 국제 산업기술정보팀을 가동하는 한편, 국내 산업체들의 지원을 받아 국내 산업기술정보팀을 가동한다. 정책팀은 정보팀들과 공동으로 "전쟁 게임"을 하듯이 국제간의 작용과 반작용을 다각적으로 정밀 검토하고 시뮬레이션 하면서 연차적인 발전계획을 수립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막대한 기억용량과 처리능력을 갖는 컴퓨터의 지원이 필수적이다. 이 정책팀은 계획수 립 후에도 상시 가동하여 연차별 계획달성도를 점검하고 변동상황을 재입력 하여 장기계획을 손질하고 알맞는 대응책을 수시 강구할 수 있도록 해야 할것이다.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있는 기술경쟁시대에 과거 과시행정시대에 쓰던 과 시성 초등정책과정은 더이상 쓸 수 없다. 치열한 국제 경쟁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돌파구를 찾는 현실성 있고 전문성있는 정책수립과정을 갖춰야 한다. 부처간 이기주의와 부처업무의 중복성을 탓하고 있기 보다는,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조직 및 제도 차원의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적어도 한 나라의 장래를 좌우하는 정책을 수립하려면, 최고의 전문성을 동원하여 국민이 신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정책수립과정은 비단 과학기술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정책의 전반에 걸쳐서 적용될 일이다.

<서울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