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정권의 10월 유신선포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았던 73년초 경기도 부천 한복판에 요란한 기계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당시 복숭아밭이지천이던 부천에서 기계음을 듣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길을 가던 많은 사람들이 공장안을 기웃거리며 모터의 핵심부품인 스테이터의 조립광경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당시 모터조립생산에 참여했던 몇몇 사람들은 국내최대의 AC모터전문업체 (주)성신(대표 이해종)의 초창기모습을 이렇게 설명한다.
70년대초까지만 해도 동대문시장에서 직물업을 하고 있던 이사장이 모터사업 에 참여하게 된 것은 초창기업체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아주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됐다. 당시 호황세를 구가하던 섬유업계 관계자들은 시찰단을 구성해 곧잘 일본섬유공장을 견학하곤 했다. 이사장이 낀 시찰단이 우연히 방문한 공장이 바로 성신과 거의 20년 넘게 기술제휴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는 시나노겐시 주 였다. 명주실을 전문으로 뽑아내는 이 공장 한켠에는 사업다각화를 위해 설치해 놓은 모터조립라인이 있었다.
섬유기술습득을 위해 이 공장을 방문한 이사장의 눈에는 사업감각때문인지 명주실 뽑는 기계보다는 모터가 먼저 들어왔다.
모터에 대한 이사장의 생각은 분명 남다른 면이 있었다는게 주변사람들의 공통된 기억이다. 아직도 "모터는 사람으로 치면 심장과 같은 것"이라고 직원 들에게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이사장은 그 당시 벌써 모터를 수출주력상품으로 생각했던 인물이다. "당시 여건이 여러모로 타지역에 비해 떨어졌던 부천 에 자리잡은 것은 순전히 수출을 염두에 두고 수출항으로 인천을 이용한다는나름대로의 생각에서 비롯된 겁니다" 현재 세계 25개국에 모터를 수출하는 업체로 성장한 성신의 밑바탕에는 바로 이런 창업자의 의지가 깔려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모터공장설립을 결심한 이사장은 우선 전문인력확보를 위해 수소문한 끝에한 친지로부터 성용선씨를 소개받는다. 금성사 김해공장에서 엔진니어로 일하던 성씨는 당시 신혼으로 주말부부청산을 위해 서울생활을 간절히 원하던때였다. 성신에 합류한 성씨는 부천공장 설립부터 일시나노겐시의 기술이전 에 이르기까지 중추적인 역할를 하게 된다. 처음 시나노겐지로부터 OEM주문 을 받아 시작한 스테이터(고정자)조립은 성신이 모터기술을 축적하는데 결정 적인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그러나 74년 불어닥친 오일쇼크(유류파동)는 성신을 또다시 직물산업으로 회귀토록 만든다. 경기침체로 스테이터주문이 크게 줄자 공장가동을 위해 스테 이터생산은 잠시 중단한채 가죽의류생산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변변한 생산품목없이 시나노겐시로부터 기술이전과 설비도입에만 힘써온 성신의 모터사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은 70년대를 거의 다 보낼 무렵인 79년이다. 금성사로부터 냉장고 팬모터를 정식으로 수주받은 이때를기점으로 성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한다.
내수기반의 확대로 양산기술이 축적되면서 세계모터시장에서도 성신의 이름 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성신모터의 품질을 가늠케해주는 유명한 일화 로는 미 웨스팅하우스사에 OEM공급을 하게된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지금처럼 변변한 항온항습기도 없었던 시절 냉장고의 냉동칸에 모터를 넣다가 꺼내는 방식으로 악조건시험을 하면서 개발한 순환팬모터는 소음을 비롯한 모든 면에서 외산제품보다 오히려 성능이 뛰어났다.
구매계약을 위해 성신을 방문한 미웨스팅하우스관계자는 가격을 조금이라도낮추려는 의도였는지 굳이 소음을 줄이기 위해 원가를 올리는 추가부담을 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 성신의 기술담당은 이에 대해 당신네 나라와는 달리 우리는 냉장고를 안방에 두고 자기 때문에 저소음은 냉장고용 모터의 중요한 성능중의 하나"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일련의 이런 사건으로 인해 성신에 대해 깊은 신뢰성을 갖게 된 웨스팅하우스는 결국 성신과 공급계약을 맺게 되었고 그후 미주지역은 물론 유럽에서도 성신의 AC모 터는 모터강국인 일본을 위협하는 유일한 제품으로 자리잡게 됐다.
국내 모터시장에서 AC모터만큼은 일본에 밀리지 않고 나름대로 경쟁력을 확보하는데에는 성신과 같이 기술력에 바탕을 둔 대형전문업체의 출현이 결정 적인 역할을 했다. 또 성신의 부상이후 모터를 비롯한 각종 전자부품들을 생산하는 중소업체들이 부천으로 모여들면서 이곳을 임가공을 전문으로 하는작은 "전자메카"로 떠오르게 했다는 사실도 기억해 둘 만하다.
<김경묵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