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곽태석회장은 이후 전자수출조합(현 전자공업진흥회 및 전자공업협동조합 의 전신)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며 초창기 국내전자부품산업을 일구고 78년 그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는다.
저항기산업 역시 곽회장이 개화시킨 대표적인 전자부품산업분야다.
국내 저항기 양산체제를 연 한국호쿠리쿠(현 한륙전자)가 설립된 것은 한국 도시바의 성공 및 곽회장의 인맥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0년대초 일본에서 광양정밀을 경영하여 사업에 성공했던 곽회장은 도시바의 저항기 관련 협력업체였던 일호쿠리쿠덴키의 나카무라 사장과 친분이 있었다.
나카무라사장으로부터 한국내 합작투자사설립의사를 확인한 곽회장은 한국도 시바설립 이듬해인 70년 4월13일 일호쿠리쿠덴키와 50%씩 출자、 자본금 4천만원의 한국호쿠리쿠(주)를 설립한다. 초대사장은 곽태석씨가 맡았고 일호 쿠리쿠덴키사는 생산설비이전과 함께 기술 및 경영지도를 한다. 한국호쿠리 쿠의 설립은 국내 저항기산업에 큰 획을 긋는다.
60년대 후반 들어 트랜지스터 라디오 및 TV가 등장하면서 저항기수요도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지만 기술 및 자본이 박약했던 국내업체로서는 일본의 기술과 자본의 흡입없이는 이 대세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 선두주자가 한국호쿠리쿠였다.
한국호쿠리쿠의 설립과 뒤이은 성요사의 고아덴키와의 기술제휴、 성미전자 의 설립 등으로 국내 저항기산업은 본격적인 개화기를 맞게 된다.
일본의 기술과 자본을 맨 먼저 국내에 도입한 한국후쿠리쿠는 로열전자가 모방생산했던 P타입의 탄소피막저항기류와 국내 최초의 산화금속피막저항기를국내에 선보였다.
한국호쿠리쿠는 일호쿠리쿠사의 설비도입덕택에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규모인 월산 5백만개를 생산、 대부분 로컬수출용으로 공급하고 일부는청계천상가에 내보낸다.
그러나 이같은 생산능력도 당시 수요에는 턱없이 모자라 세트업체들에 배급 주다시피 했다는 후문이다. TV에 4백50개、 라디오에는 2백50개가 들어가는것을 비롯해 전자제품이라면 저항기를 대규모로 필요로 했으니 월산 5백만개 도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저항기산업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인력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일본에서 최신설비는 들여왔으나 이를 가동할 만한 인력이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애를먹었으며 자연히 당시 국내에 들어와 있던 일호쿠리쿠측관계자들은 칙사대접 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호쿠리쿠는 일호쿠리쿠에 정기적으로 적게는 10명 많게는 40 여명까지 연수를 보내게 되며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한국호쿠리쿠는 74년 회사명을 한륙전자로 개명한다. 육영수여사피살이후 대 일감정이 극도로 악화된데다 정부사이드에서 일본식이름을 모두 바꾸라는 지시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호쿠리쿠덴키(북육전기)측은 한국의 한과 북륙의 북을 따서 한북전기를 제안했으나 정사장이 북은 북한을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반대해 한육전자으로 결정됐다는 후문이다.
한국호쿠리쿠의 등장과 비슷한 시기에 성요사도 P타입 저항기의 대량생산을 모색하기 위해 일본업체들을 찾아다닌다. <조시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