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부품산업의 발자취 (161);저항기 (3)

처음으로 저항기를 만드는데 힘에 부치는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고 특히어렵게 만들어진 제품의 저항값을 측정하는 것 또한 난제였다.

진공관 라디오를 갖고 있으면 동네에서 갑부 소리를 듣던 시절이니 아무리 잘나가는 기업이라도 저항기 측정용 테스터를 제대로 갖고 있을 리 만무했다. 조잡하기는 했지만 만들어진 저항기의 저항값이 얼마인지는 알아야 했지요.

그러나당시 금성사내에서도 테스터는 한대 또는 두대정도밖에 없었고 이또 한 귀중품 취급을 받았습니다. 빌려줄리가 없었죠. 그래서 생각한 것이 군용 으로 사용되는 비슷한 계기판을 뜯어다 훼스톤브리지형 계측기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엄기춘실장과 함께 일을 했던 오금석(현 성동전자사장)씨 의 기억이다.

이렇게 해서 최초의 국산저항기는 만들어졌다.

"가물가물하지만아마 엄실장이 일본책을 보고 카본증착을 입힌 이후 테스터 를 조립해 카본증착 저항기를 생산하기까지 1년여가 소요됐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저항기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웃겠지만 기본기술이란 아무것도 없었던 당시 1년만에 상용화개발을 완료한 것은 칭찬받을만 했습니다."장 장 1년의 세월이 걸린 끝에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L타입의 자기관식 카본증 착저항기는 "1백옴、 1W용"제품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를 최초로 사용한 제품은 라디오가 아닌 공전식 전화기였다는 것을기억하는 이는 별로 없다. 오금석씨는 다음과 같이 그이유를 설명한다.

"물론 라디오에 사용키 위해 개발했으나 이 저항기가 라디오에 사용해도 좋은지는 엄실장이나 저나 자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당시 생산되던 공전식 전화기에 시험적용해보는 것이었습니다. 기술력에 대한 확신 이 서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 저항기가 쓸만하다는 판단이 내려지고 곧이어 이희종 생산 2부장(현 LG산 전사장)이 리드와이어를 자동으로 감아주는 기계를 일본에서 들여옴으로써 65년말부터 국산저항기의 본격생산이 이뤄진다.

생산은 금성사 생산2부 전자과 제2부품실에서 이뤄졌으나 생산직 사원이 몇명 안되는데다 모든 작업이 일일이 손으로 이뤄지다보니 생산량은 한달에 겨우 1만개 안팎에 불과했다. 현재 한륙전자가 한달에 4억개 이상을 생산하는 것과 비교하면 "새발의 피" 수준이다.

소량이지만 여기서 생산된 저항기는 당시 국내 진공관 라디오용 저항기 수요의 20~30%를 충당하게 된다.

그러나 제2부품실 시대도 곧 막을 내리게 된다. 제2부품실에서 저항기생산이 시작된지 채 6개월이 되지 않아 다시 저항기생산은 중앙연구실로 완전히 넘어간 것이다.

"뒤에 최초의 저항기생산업체인 성요사 설립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당시 금성사는 경영전략의 일환으로 부품소재산업의 육성을 위해 저항기.스피커 등자체생산해왔던 부품을 전문생산할 계열사를 설립하게 됩니다. 64년 합성수 지 성형물 제조업체인 삼영정기공업사를 필두로 성예사.성철사.성아사.성장 사.성요사.성음사.성주사 등이 그것이지요. 당시 제2부품실은 스피커.볼륨.

바리듐을생산해온 터라 이들에 대한 집중화가 필요했고 다시 성음사로 분리독립을 추진키 위해 저항기부문을 중앙연구실로 넘겨주게 됐던 것이지요" 오 금석씨는 저항기생산이 당시 제2부품실에서 중앙연구실로 넘어간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제2부품연구실은 중앙연구실에 저항기생산과 관련한 장비일체를 넘겨주고 부산상고졸업 후 공군에서 기술병으로 근무했던 황치태(현 한국세끼누수(주) 전무)씨가 이의 책임자로 중앙연구소로 발령이 난다. 황치태씨는 제2부품실에서 장비의 실제적인 운용을 담당해온데다 공정전체를 파악하고 있어 책임자로 발탁됐으며 이후 중앙연구실이 본격적인 저항기생산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진공관 라디오 시대가 점차 가고 트랜지스터형 라디오가 새로운 주력 상품으로 부상하자 금성사는 이순간 또다른 중요한 선택을 시도하게 된다.

고기술의저항기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체제구축이 절실해진 것이다. 이에따라 국내저항기산업의 초창기 역사는 금성사 온천2동에서 두고동으로옮겨간다. 67년 1월9일 저항기생산 전문업체인 성요사가 설립된 것이다.

<조시용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