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사(현 LG전자)의 경영혁신작업의 일환으로 67년1월9일 설립된 성요사는국내저항기산업을 본격 개막한다.
삼영정기공업사(64년4월)、 성예사(65년6월)、 성철사(65년10월)、 성아사(6 6년1월)、 성장사(66년6월)에 이어 금성사의 6번째 자회사로 설립된 성요사 는 초대사장에 금성사관리부문에 근무했던 고문태준씨가 임명됐으며 공장장 은 역시 금성사TV실장을 담당했던 구영원씨가 맡았다.
현재 저항기생산업체인 금산전자 이범석사장과 착막전문업체인 거명산업의오원준사장 트랜스포머생산업체인 유성전자의 문태진사장 등이 초창기실무 주역을 담당했으며 경인옴시스템 김인복사장도 68년 저항기 담당실무책임자 로 합류한다.
이들을 비롯해 성요사 초창기근무자들이 후에 나름대로의 기술력을 발판으로 저항기산업을 중심으로한 전자부품산업에 종사하게 된다고 해서 일부에서는이들을 "성요사인맥"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금성사 중앙연구실을 시발점으로 제2부품실、 다시 중앙연구실、 성요사의 창립에서 볼 수 있는 특이한 사실은 기술인맥의 단절이다.
엄기춘실장、 오금석제 2부품실주임 등은 국내 최초로 저항기를 개발、 생산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요사 창립멤버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며 제2부품실에서중앙연구실로 생산이 이전될 때 실무책임자였던 황치태(현 한국세끼누스전무 씨도 성요사 설립시 금성사에 잔류한다.
금성사내에 학사출신이 몇되지 않았던 것도 이유였지만 본사가 아닌 자회사 로의 발령은 소위 "물먹었다"는 평가를 받아 스스로도 성요사로의 발령을 기피했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성요사는 69년 부산 해운대구 반여동으로 본사를 옮길 때까지 양산군 두고동영국아동보호재단의 건물을 임대해 생산에 나서게 된다. 건평 1백50여평규모 의 공장을 임대사용했던 성요사는 창립원년에는 관리직을포함해 20여명의 인력으로 출발、 초보적인 생산을 하게 된다.
당시 저항기담당 실무책임자였던 이범석씨(현 금산전자 대표)의 기억이다.
"성요사창립원년인67년에는 제조업체라고 하기에는 초라한 규모였습니다.
겨우20여명으로 생산에 나섰으니 생산량이 많을 수도 없었지요. 그렇지만 68년에는 사업확장에 나서 생산직여사원이 1백20여명에 달하게 됐지죠. 제조 업체로서의 구색을 갖춰나가고 본격적인 생산이 이뤄지기 시작한 셈입니다" 68년 성요사의 저항기 생산규모는 평균 월30만개규모에 불과했으며 잔업 등을 통하면 1백만개、 주야근무체제로 가동하면 월수백만개까지 생산했던 것으로 당시 관계자들은 기억하고있다.
전작업이 사람손으로 일일이 이뤄졌지만 수율은 70%에 달했으며 생산된 제품의 저항값은 중간치에 한했다.
문태진씨는 당시 만들어진 저항값이 대개 20옴에서 2백K옴까지였다고 말한다. 지금은 피막기술이 발달해서 어렵지 않게 저저항.고저항치의 제품까지 만들수 있지만 당시는 그게 아니었지요. 우리는 대부분 중급제품을 생산했으며 저저항치나 고저항치제품은 일본에서 수입해 사용했습니다" 초창기 저항기산 업의 또 다른 주역으로 삼성요업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저항기생산의 필수원부자재인 백자기관의 수급은 일본에서 들여온 것이아니었고 부산안락동에 위치했던 삼성요업(대표 심상욱、 현 반월공단소재) 에서 전량공급받아왔다. 카피한 제품에다 생산기술도 저급했지만 원부자재만 큼은 우리손으로 조달한 것이다.
초창기에 생산된 L타입의 자기관식 탄소피막저항기의 가격은 지금도 물가나 저항기산업의 왜소한 현재모습을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된다. 95년 현재 저항 기가격은 대략 개당 2원30전에서 3원수준으로 거래되고 있다. 당시에도 저항 기가격은 2원~3원수준이었으며 이를 두고 성요사초창기멤버들은 "당시 금성 사구매담당자들에 접대한번할라치면 저항기 한가마니는 싸들고 가야했다"고 빗대서 말하기도 한다.
95년 현재 저항기가격이 67~68년 초창기시절의 저항기에도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국내전자부품산업의 위상을 역설적으로 설명해 준다.
물가로 말하면 몇 천% 올랐지만 저항기가격은 요지부동인 것이다.
이를두고 일부에서는 생산성 향상、 기술발전에 따른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있지만 현재 저항기산업종사자들은 세트업체의 횡포가 작용한 것이라고 한결같이 강조하고 있다.
완전히 수작업에 의존해 생산이 이뤄졌던 L타입의 자기관식 카본증착 저항기 는 69년초기 일본 저항기업체와의 기술제휴바람에 의해 일대변환을 맞게된다. <조시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