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요사 초대사장인 문태준씨와 마찬가지로 신해근(현 우일전자 회장)씨 역시 위트산업의 경험을 살려 저항기사업을 다시 추진한다.
신해근씨는 60년대후반 서울 대방동에 위트전자를 설립해 세라믹 콘덴서를 만들어 성공하자 ADB차관을 도입해 전주에 위트산업을 설립했었다. 위트산업 은 저항기.스피커.세라믹 콘덴서를 생산했으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저항기 를 해외에 수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70년대초 저항기경기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경영이 어려워지자 신해근 씨는 위트산업의 경영을 조흥은행측이 선임한 이보진씨에 넘기고 위트전자에 전념한다. 신해근씨의 저항기사업 재추진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 이뤄진다.
위트전자에전념하던 신해근씨는 국내에 세라믹 콘덴서 붐이 일자 73년초 성남에 세라믹 콘덴서공장설립을 추진하는데 공장부지를 확보한 시점에 닛토 일동 사로부터 저항기합작생산을 제의받는다.
닛토사는 위트산업에 저항기자동화생산설비를 공급했던 회사로 일본최대의 저항기설비메이커였다. 닛토측의 제안은 일본내 저항기선두업체인 가마야와 함께 한일합작법인을 설립해 그 열매를 나누자는 내용이었다.
닛토사는 한일합작법인 설립으로 안정된 설비수요처를 확보함은 물론 위트산업에서의 불명예도 만회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고 가마야는 또 다른 계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가마야사는 일본 저항기시장의 선두군을 형성했던 업체로 73년초까지만해도 경쟁관계였던 고아덴코、 로움、 마쓰시타、 호쿠리쿠 등이 합작 또는기술제휴로 한국에 진출하자 다소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었다. 신해근씨는 닛 토와 가마야사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 세라믹 콘덴서공장을설립하려던 성남부지에 73년 9월 1억여원의 자본금으로 (주)아비코(ABCO)를설립한다.
신해근씨가 50%의 지분을、 가마야와 닛토측이 나머지 지분을 소유했고 경영권은 신해근씨에 돌아갔다.
아비코의 설립으로 신해근씨의 세라믹콘덴서 공장설립구상은 다음해 4월 안 성에 우일전자를 설립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후에 위트전자를 흡수한다.
아비코의 저항기생산라인은 당시 국내업계의 생산라인과 비교、 한단계 위였다. 당시 대부분의 국내업체들이 반자동라인을 운용하고 있었던데 반해 아비코는닛토측으로부터 완전자동화된 설비를 도입해 라인을 구축했는데 이는 위트산업에 설치된 것보다도 한 등급 앞선 것이었다.
신해근사장은 당시 설비가 "2백PPM을 자랑했다"고 설명했다.
아비코의생산품목 또한 당시 국내생산품목에 비해 비교우위를 가졌다.
당시 국내에서는 4분의 1W형이 주종을 이루었으나 아비코는 8분의 1W형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초기생산량 월2천만개중 85%는 4분의 1W형을 나머지는 8분의 1W형을 생산했는데 8분의 1W형은 일본에서도 생산된 지 얼마되지않은 신기술이었다. 설립 이후 아비코는 최대의 호황을 만끽했다.
초기생산량 월 2천만개를 거의 전량 일본에 수출했고 국내판매는 거의 없었다. 경영권을 장악한 신해근씨가 오로지 합작선인 일가마야사에만 의존하고 국내판매권을 행사하지 않은 것은 의외였다.
이에 대해 신해근씨는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일본과의거래는 깨끗했고 물량을 가마야에서 소화해주니 문제될 것도 없었다. 국내판매도 생각해보았으나 국내시판에는 경영과 관련해 오해의 소지가 너무 많았다. 당시에는 언더테이블 머니가 없다면 거래가 불가능했던 시정이 었으며 일을 제대로 추진라려면 은행.관계.세트업체 등과 친숙해 질 필요가 있었는데 이를 가마야와 닛토측이 인정해줄리는 만무했다."신해근씨의 저항 기사업포기는 의외로 쉽게 이뤄진다. 저항기가 8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수익 성이 매우 양호한 품목이었다는게 일반적인 분석이고 보면 신해근사장의 사업정리는 의외였다.
"생각해보니 저항기사업은 결국 설비메이커만 살찌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지금도 그런 환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있고요. 그래서 사업정리의 사를 가마야와 닛토측에 전했고 그들도 동의했습니다." 신해근씨의 사업정리 방침에 따라 아비코의 지분 1백%는 재일교포인 김학진씨의 아들 김제영 현사장에 넘어간다. <조시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