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요사외에 한국호쿠리쿠.위트산업.성미전자.신영전자.한국아르오오므.삼양 전자부품기기.아비코.필립스전자코리어.아리아전자 등은 70년에서 74년까지 설립된 업체들이다.
저항기산업이 시작된지 불과 3년이 경과한 시점인 70년부터 74년까지 5년동 안 국내에 저항기전문생산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데에는 몇가지 이유 가 있다.
70년대초반부터 70년대중반까지의 기간은 저항기수요처가 크게 확대됐을 뿐아니라 수요량도 폭발적으로 늘어난 기간이었다.
당시관계자들은 "라디오의 대중화에 이어 TV.오디오의 보급이 크게 늘어나 80년대중반까지 저항기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마진도 매우 좋았다"고 기억한다. 없어서 못팔던 때였고 생산량이 늘면 늘수록 마진도 늘어나던 시기였다.
국내업체간경쟁이라 해봐야 설비증설경쟁이 대부분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장에 진출한 업체마다 설비 확충에 나섰고 매년 2배 내지 3배 이상씩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 추세였다.
이 와중에서 저항기업체가 사업다각화로 세트산업에 진출하는 경우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또한 저항기분야가 첨단전자산업내에 속해 있으면서도 손쉽게 어프로치할 수있는 사업이었다는 점도 저항기가 국내정착초기에 활성화될 수 있었던 배경 으로 작용한다.
저항기산업은 오늘날에도 대표적인 장치산업으로 꼽히고 있는데 저항기를 만들 수 있는 기본적인 생산인력과 자본만 확보하고 있으면 누구든지 이 사업 에 손쉽게 참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일본에 손쉽게 접근 가능한 저항기 설비메이커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는 점도 국내업체들의 사업참여를 손쉽게 하는 배경이 됐다.
당시 일본에는 세화(정화).닛토(일동).도쿄웰즈 등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춘 저항기설비 업체들이 자리잡고 있었는데 국내업체들은 대부분 이들로부터 설비를 들여왔다.
또한 이들 일본설비업체들은 한국에 저항기설비판매를 늘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던 분위기여서 국내업체들은 이들 일본업체에 설비대금만 주면 누구든 저항기산업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일본 등 해외업체들의 한국내 진출경쟁도 저항기산업의 조기정착에 한몫을 했다. 70년부터 74년까지의 기간동안 기술제휴 또는 국내관계자와 합작을 체결했던 업체는 그 수만도 적지않다.
기술제휴 또는 합작법인활성화에 불을 지핀 것은 호쿠리쿠와 고아덴코였다.
일호쿠리쿠사가 곽태석 한국전자창업주와 한국호쿠리쿠를 설립하고 고아덴코 가 성요사에 기술을 이전해 성공을 거두자 이에 자극을 받은 일본내 경쟁업체들이 한국에 다투어 진출한다.
로옴이 호쿠리쿠의 한국진출에 이어 한국아르오오므를 설립했고 뒤이어 가마 야가 합작을 통해 아비코를、 혼다통신공업이 아리아전기와 기술제휴를 추진 하는 등 한국진출이 줄을 잇는다.
국내에 저항기사업환경이 무르익자 필립스 등은 1백%출자법인을 설립、 각 지역 계열사에 대한 전자부품공급기지로서의 역할을 수행케하고 있다.
이즈음은 오늘날처럼 국내관계자들이 기술제휴를 위해 몸부림을 치지않아도일본업체들이 스스로 합작생산을 요청하던 기간이기도 했다. 국내업체들의 노력도 뒷받침됐음은 물론이다.
저항기를 만드는 데 필수 원부자재였던 리드와이어、 캡、 세라믹 로드 등원부자재의 조기국산화가 발빠르게 추진돼었고 이는 저항기산업성장의 배경 이 됐다.
75년경 한국정밀기술센터(FIC)와 전자조합의 활동도 빼놓을 수 없다.
생산기술연구원의전신인 FIC내에는 다른 전자부품과 함께 저항기기술분과위 원회가 설치돼 KS규격기준의 제정을 추진했다. KIST의 박사급이 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아리아전자 차순수씨가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JIS를 바탕으로 KS규 격기준을 제정했다.
또한 전자조합내에도 국산화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리드와이어.캡.세라믹로드의 국산화를 위한 각종 활동을 병행、 오늘날 저항기산업의 기틀을 다져갔다. <조시용 기자> <4년2개월간 연재해온 "부품산업의 발자취"가 오늘로 대단원의 막을 내립니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