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익과 오명의 만남이 우리나라 통신의 발전과 어떻게 연결될까. 이 질문 에 대한 대답은 뒤로 미루고, 우선 두 사람의 이력서부터 살펴보자.
1938년생인 김재익은 경기고 2학년때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 외교학과에 입학했다. 원래는 수학 성적이 좋았고 기계공학 분야에 관심이 많아 공대로 진학할 생각이었으나 색약인 탓으로 마지못해 외교학과를 택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한국은행에 수석으로 입사했고, 한국은행에 재직하면서 모교에서 국제정치학 석사과정을 밟았고, 한국은행의 평행원 신분임에도 서 울대에서 정치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그 후 왕성한 학구열을 억누를 길 없던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와이대학에서 경제학석사, 다시 스탠포드대학에 서 통계학석사 학위를 획득하여 3개의 석사학위 소지자가 되었고, 다시 스탠 포드대학에서 경제학박사 학위마저 따냈다.
1973년 박사학위를 얻은 해에 그는 귀국했다. 아직도 한국은행에 적을 둔 채 청와대 비서실로 들어가 김용환 경제수석 밑에서 자문역으로서 관계에 첫발 을 내딛었다. 거기에서 그가 맡은 일은 부가가치세 도입의 이론적인 바탕을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는 부가세의 도입이 옳다는 소신을 가지고 집요하게그 작업을 추진해 나갔다.
1974년 남덕우 재무부장관이 부총리가 되면서 그는 경제기획원으로 자리를옮겨 비서실장, 경제기획관을 거쳐 경제기획국장이라는 요직을 차지했다. 그의 능력을 높이 산 남부총리가 일반직인 경제기획국장 자리를 별정직도 가능하도록 고쳐가며 그를 그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
비서실장 시절부터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4차 5개년계획에 반영될 주요정책 과제들을 검토하는 것이었는데, 그중에서 남달리 그의 관심을 끈 분야는 통신이었다. 사회간접자본으로서의 통신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먼저 간파한 그는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있어 통신발전이 최우선 과제라 생각했고, 통신 발전의 구체적인 방안으로 전자교환기의 도입을 내세웠다.
그러나 주무부처인 체신부 관료들의 보수의 벽은 생각보다 높았다. 그들은전자교환기의 도입이 시기상조임을 내세워 움직이려 하지 않았고, 기존의 기계식 교환기를 생산하는 생산업체들의 반발도 예상보다 드셌다.
그러자 그는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남부총리를 움직여 경제장관간담회라는비공식적인 기구를 내세워 전자교환기의 도입을 정부의 방침으로 결정하고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로 하여금 별도의 팀을 구성하여 세부계획을 수립케 했다. 그 결과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ITT의 M10CN이라는 전자교환기를 도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기획원 경제기획국장으로서의 그의 관료생활은 그렇게 성공적이 지 않았다. 그는 성장 위주의 관주도형 경제체제에 대해 과감한 개혁을 주장 하며, 그 대안으로 안정.자율.개방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는데,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 그의 주장은 너무 순수했다.
때문에 대학의 동기동창인 서석준 경제기획원차관마저 그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두 사람은 중요한 경제정책 문제를 놓고 곧잘 토론을 벌였으나서석준은 김재익의 주장을 이상론으로 치부하며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그럴때 그는 곧잘 관료로서의 자신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곤 했다.
때문에 그는 관료생활 대신 연구원생활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서차관에게 부탁해 KDI행을 자원했다. 그러나 KDI 객원연구원으로 내정돼 사표를 제출하던 날 국보위 위원으로 차출되었음을 통보받고, 이튿날부터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국보위로 출근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국보위 상임위원회에서 경제 과학분과위원회 간사직을 부여받았는데, 위원장으로 내정된 조순교수가 국보 위행을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뜻밖에 위원장 자리를 맡았다.
국보위 생활은 관료로서의 그에게 뜻밖의 행운을 안겨 주었다.
국보위 상임위원장 전두환에게 경제 강의를 하는, 또 하나의 엉뚱한 임무가 부여됐던 것이다. 그는 매일 아침 5시반에 자동차에 실려 연희동으로 가서 2시간씩 경제 강의를 한 다음 출근하는 생활을 되풀이했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가정교사로 임명되어 당시의 절대권력자 전두환과 인간적으로 친해질 수 있는 호기를 만났던 것이다.
가정교사로서의 김재익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백지나 다름없는 전두환 상임위원장의 머릿속에 간단한 경제원리와 한국 경제의 당면 과제 등에 대한 산뜻한 그림을 그려넣어 주었다. 수재들이 흔히 그렇듯이, 김재익은 복잡다단한 경제 현상을 단순하게 정리하여 알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는 최고통치자의 머릿속에 안정.자율.개방이라는 자신의 경제 철학을 뿌리 깊이 심어줘 물가 안정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게 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1980년 9월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전두환은 실력있는 스승 김재익을경제수석비석관으로 임명했다. 탁월한 경제이론뿐만 아니라 학처럼 깨끗한 인품의 소유자인 김재익을 인간적으로 신임했던 전대통령은 그때부터 경제문제에 관한 한 거의 전적으로 김재익에게 맡기다시피 했으며, 김재익은 물을만난 고기가 되어 우리나라 경제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인물로 둔갑하게 되었다. 한편 1940년생으로 경기고 1년 후배인 오명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육사에서 교수요원의 양성을 위해 성적이 우수한 졸업생에게 주어지는 특전에 따라 서울대 공대에 편입했다. 그 무렵 그는 야전생활이냐 학문의 길이냐를놓고 한때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학자로서의 길이 적성에 맞다고 판단했고, 서울공대를 졸업하자 육사 교관으로 전자공학을 가르쳤다.
교수생활은 생각대로 그의 적성에 맞았다. 그는 육사에서 강의를 시작한 첫날부터 교재나 강의노트를 들추지 않고 복잡한 전자회로를 칠판 가득히 그려나갔다. 미적분방정식과 같은 복잡한 수식을 풀어 나갈 때도 교재를 참고하는 법이 없었다. 그만큼 철저한 준비로 학사학위를 갓따낸 햇병아리 교관이 권위있는 교수로서의 분위기를 잡아 나갔다.
육사 교관생활 2년만에 그는 육사에 적을 둔 채 미국 유학 길에 올라 뉴욕주 립대학 대학원에서 다시 향학열을 불태웠다. 거기에서 2년 8개월이라는 짧은기간에 석사와 박사학위 과정을 수료하여 그 대학 전자공학과에서 최단기간 의 학위 취득이라는 기록을 수립한 다음 다시 육사로 돌아와 교수생활을 계속했다. 그때까지 그는 군인이라기보다 학자로서의 길을 착실히 밟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기를 가져다 준 것은 1979년1월 국방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긴 일이었다. 그에 앞서 1년 동안 국방부로 파견근무 를 발령받아 5명의 박사급 연구원으로 팀을 구성하여 방위산업 육성 전략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와 군수물자의 표준화 방안, 군수물자 부품의 효율적인확보 방안을 다룬 일이 있었고, 아울러 국방부 전산의 표준화 방안도 검토한 일이 있었다. 그 기간에 그는 국방연구원의 전신인 국방관리연구소의 창설요원으로 설립작업에 참여했으나, 그 연구소는 인문.사회과학 계통의 연구소였기 때문에 거기를 떠나 전문분야의 기술을 다루는 국방과학연구소로 자리를옮겼던 것이다.
국방과학연구소에서 그는 국방과 관련된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땅굴 탐사 장비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군용 컴퓨터를 개발하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땅굴 탐사의 경우, 이미 뚫려 있는 땅굴을 찾아내느냐 현재 뚫고 있는 땅굴을 찾아내느냐, 그것도 굴착기로 뚫고 있느냐, 폭탄 을 사용해서 뚫고 있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기술과 방법이 있고, 따라서 여러가지 장비를 필요로 하는데, 그러한 장비의 개발을 위해 그는 지하 수백미터 의 탄광을 드나들며 실험을 하기도 했다.
그 중 일부 장비는 개발되기도 했으나 전체적인 프로젝트가 완료되기 전에그가 국보위로 차출됨에 따라 그 프로젝트는 중단되었는데, 한국과학원의 라 정웅 박사가 그것을 이론적으로 더 발전시켜 장비를 개발했고, 결국은 땅굴 을 발견하는 개가를 올렸던 것이다.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과제는 포병용 컴퓨터의 개발이었다. 과거의 한국 전은 남쪽에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어 포병의 활동에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앞으로의 전쟁에 있어서는 그러한 보장이 없기 때문에 제공권을 빼앗길 경우에 대비한 포병 운영방안을 마련해야만 했다.
즉, 미래전에 대비한 새로운 포병 운영 방안을 제시하고 거기에 따라 새로운 포병장비를 개발해야 하는데, 그러한 작전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이 포병용 컴퓨터의 개발이었다. 때문에그는 단순히 컴퓨터만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고포병 전략이라는 엄청난 프로젝트를 관리하는 방법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러한 경험은 뒷날 그에게 전자교환기 개발 가능성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었다.
국보위 상공자원분과 위원으로 변신한 오명이 관심을 갖고 검토한 문제는 컬러TV의 시판이었다. 그무렵 우리나라 전자산업체는 컬러TV를 생산, 수출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는 컬러TV 방송이 방영되지 않았고 그것의 시판도 허용되지 않았다. 농촌에는 흑백TV도 다 보급되지 않았는데 도시에 컬러TV를 보급 하는 것은 국민간에 위화감을 조성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또컬러TV는 전력을 많이 소모하는데다 화려한 영상으로 인하여 과소비를 조장 할 우려가 있다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였다.
전자산업은 일정한 발전 단계를 거치면서 성장해 왔다. 진공관 라디오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로,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흑백TV로, 다시 흑백TV에서 컬러TV로 단계를 밟아 발전해 왔고, 각 발전 단계에서 그 수요가 포화상태에 이르기 전에 다음 단계의 제품이 나와야 그 나라의 전자산업이 계속 발전하게 되는데, 우리나라는 흑백TV에서 컬러TV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정책의 잘못으로 정체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비경제적인 논리에 의해 컬러TV의 시판과 방영이 금지되었기 때문에우리나라의 전자산업은 꽃을 피우기도 전에시들어 버릴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따라서 가전3사들은 부도 직전의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무렵에 발족한 국보위 상공자원분과위원회에서 전자산업 육성방안을 신중 히 논의한 결과 컬러TV의 시판 허용이 가장 시급한 정책 과제라는 결론을 내리고 상공부와 협의해 그것의 시판을 허용했다. 그러나 컬러TV의 시판 허용 만으로는 목적한 만큼 수요가 늘지 않았다. 따라서 청와대 비서실로 자리를옮긴 오명은 컬러TV의 방영마저 추진하여, 마침내 1980년 12월부터 컬러 TV의 방영이 시작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