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역사는 고작해야 30여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전자산업의 연륜속에는 짧은 기간에 자립경제기반 구축을 달성하려는 정부와 기업의 노력이 용해되어 있다. 바로 우리 전자산업의 역사를 대변할 수 있는 수출드라이브형 정책"이란 명칭에는 지난 30여년 동안 수출을 장려해온 정부의 노력과 경쟁력을 지닌 제품을 생산하려는 기업의 노력이 포함되어 있다. 60년대 국내 가전산업은 고작해야 수입 부품을 이용한 라디오와 전축、 선풍 기 정도를 생산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5.16군사정부 는 기본경제정책으로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선택했다. 정부의 이런 선택은 수출활성화만이 전쟁이후 침체된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서였다. 60 70년대 가전산업 활성화 정책중 하나는 정부 및 관변단체 주도의 각종 사회운동을 통한 기반여건을 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새마을 운동"에서부터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 "1억달러 수출목표달성 운동" 등 수많은 "운동" 이 진행됐다. 이러한 정부의 각종 운동은 국민들의 "잘살아보자"는 의식과접 목돼 전자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토양이 됐다.
61년 12월 국영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면서 국내 기업인들 사이에서는 흑백 텔레비전을 생산해보자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을 사치품으로 보았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생산된 흑백텔레비 전은 66년 1만5백대、 69년 7만3천대의 생산실적을 거두며 라디오를 대체하는 새로운 가전제품으로 부상했다. 부품산업 또한 흑백텔레비전에 소요되는 콘덴서 저항기 브라운관 등 3백여종이 넘는 부품 수요 증가로 기초산업으로 서의 역할을 다질 수 있었다.
70년대 국내 가전산업의 흐름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가전산업의 70년대는 제품생산 및 수출 증가로 성장산업으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기였으며、 선진국과의 기술제휴를 통해 새로운 제품을 속속 개발하던 시기였다.
정부에서는 선진기술 습득을 위해 각 지역에 외국인 투자를 우대하는 공단설립을 추진했다. 이 시기부터 구미공단 구로공단 등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들어 가전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둘째、 70년대는 선진국과의 통상마찰이 시작된 시기였다. 일부 기업들의 수출 가전제품이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으로부터 덤핑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밖에73년부터 시작된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국내 경기는 침체국면을 맞기도 했다. 석유파동의 파장은 가전분야에도 큰 영향을 남겼다. 국제 원자재가 격의 급등으로 가격경쟁력을 우선시했던 국내 가전산업은 일대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60년대 가전산업이 라디오와 흑백텔레비전에 의해 주도됐다면 70년대 가전산업은 컬러텔레비전에 의해 주도되는 시기였다. 74년 한국나쇼날에서 처음 생산하기 시작한 컬러텔레비전은 77년 총수출물량 11만대를 돌파하며 새로운가전분야의 주력상품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국내 가전산업은 VCR가 개발되면서 고도성장을 계속한다. 특히 VCR는 컬러텔레비전 테이프 음향영상산업 등 관련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커 가전제품의 호황을 이끌어내는 제품이 됐다.
79년 기계식 제품 개발로 시작된 국내 VCR기술은 81년 전자식 VCR개발로 인해 대외경쟁력을 가진 가전기술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VCR기술의 놀라운 발전에 힘입어 가전3사는 치열한 VCR 신모델 개발경쟁에 나섰으며、 아시안게임과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대내외적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았다.
90년대에 들어서 가전산업의 경기는 80년말부터 강세를 보였던 VCR와 대형 컬러텔레비전、 캠코더 판매의 약진으로 상승세를 이어갔다. 이같은 가전산업의 활황세가 이어지면서 94년 현재 전자.전기.기계제품은 전체 수출비중의 32.8%를 차지해 섬유 철강 자동차 등을 제치고 현재까지 1위를 고수하고 있다. <김상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