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년 9월에 전자교환기 도입 기종으로 M10CN이 결정되고, 그 해 12월에 KTC 와 BTM 사이에 도입계약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듬해 3월 KTC 구미공장의 건설 작업이 시작될 무렵부터 체신부는 전자교환기의 추가 도입을 검토했다. 그 해 6월 체신부는 그 동안 통신기술연구소에서 준비한 연구보고서를 토대로 해 작성한 "전자교환기 도입계획 보완 검토"라는 이름의 보고서를 청와대에 제출함으로써 교환기 생산업계에 또 하나의 충격파를 던졌다. 통신 수요의 급증, 전화청약 적체의 누적, 가용재원의 증가 등의 여건 변화를 지적한 이 보고서는 "교환기의 관리.운용면이나 경제성, 미래의 종합통신망계획 등을 검코해볼 때 전자교환기의 추가 공급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전자교환기 제1기종의 도입을 결정하여 생산공장의 건설이 막 시작된 판국에 애초의 계획에도 없던 추가 공급계획을 검토했던 이유는 무엇일까?77년 전자 교환기 제1기종이 선정된 때를 전후하여 통신사업 환경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전화의 공급계획을 대폭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77년에 들어 우리나라 수출이 대망의 1백억불을 달성했는데, 이무렵 우리나라의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의 길을 치달아 도약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에따라 전화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전화 적체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은 해가 갈수록 가속화될 전망이었다. 따라서 전화 적체를 해소하여 국민들의 누적된 불만을 해소하는 것이 정부의 중요한 정책과제로 대두되었다. 한창 가속화되어 가는 경제 발전에 있어 통신 의 비효율이 보틀넥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효율을 제거하여국 제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시급한 정책과제였던 것이다.
77년부터 시작된 제4차5개년 계획 기간 5년 동안에 계획된 시내전화의 총공 급물량은 1백55만대로서 연평균 30만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79년의 전화 적체건수는 이미 60만대를 넘어섰으며, 신규가입자는 매년 50%씩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었다. 따라서 체신부는 80년대 중반까지는 전화문제를 완전히 해결 한다는 전제하에 80년대의 공급계획을 대폭 수정했다. 즉 79년의 공급 물량 은 42만대를 그대로 추진하되, 80년부터 매년 점차적으로 늘려 80년에 76만 대, 81년에 88만대, 그리고 82년 이후에는 연간 1백만대 이상을 공급한다는 모험적인 궤도 수정을 단행했다. 그리고 84년 이후에는 모든 교환기를 전자 교환방식으로 공급하기로 했다.
전자교환방식에 의한 대량 공급의 원칙이 결정될 때 당연히 대두되는 문제는 전자교환기의 일원화냐 이원화냐 하는 문제였다. 다시말해, 이미 제1기종으로 선정된 M10CN으로 계속 밀고 나가느냐, 아니면 새로운 기종을 추가로 도입하느냐는 것이었다. 대량 공급을 위한 보완책으로 잠정적으로 기존의 기계 식교환기를 공급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으나 84년부터 전량 전자교환기에 의해 공급하기로 결정한 이상 기계식교환기를 고집하기는 어려웠다. 왜냐하면 전자교환기 생산회사가 정상적으로 공장을 운영해서 공급할 경우에도 설계.제작.설치에 소요되는 기간이 18개월 내지 24개월이었다.
따라서 82년부터는 연간 1백만회선 이상의 전자교환기를 공급할 준비를 갖춰야만 84년부터 전량 전자교환기에 의해 공급할 수 있으므로 기계식교환기를 공급할 수 있는 기간은 1~2년에 불과했다.
전화의 대량공급정책이 결정될 무렵 체신부 주변에서는 일원화냐 이원화냐의 논쟁이 일기 시작했다. 정부의 애초 구도대로라면 당연히 일원화였다. 76년 정부는 시분할 전자교환기를 국내에서 개발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우선 과도기에 필요한 기종으로 공간분할방식인 M10CN을 채택하기로 결정하였으므로, 당연히 M10CN기종의 생산을 늘려 수요를 충족시키면서 국산교환기의 개발을 서둘러야만 했다.
그런데 전자교환기의 기종선정에 관한 결정권을 쥐고 있는 체신부는 전자교환기의 추가도입을 검토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원화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특히78년 12월 박원근장관 후임으로 부임한 이재설장관은 전자교환기의 추가도입을 서두르며 교환기 생산체제의 개편까지 생각했다. 그리하여 79년 3월에는 미국의 WE와 GTE, 서독의 지멘스, 일본의 NEC와 후지쯔 등 5개 회사 를 상대로 제2기종을 선정하는 국제입찰을 실시했으며, 그해 5월 제2기종 도입방침에 관해 박대통령의 재가를 얻었다.
그와 동시에 교환기 생산을 민간 주도의 자율경쟁체제로 발전시킨다는 민영 화정책이 결정되어 그동안 통신기기산업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기술을 축적 하고 시설투자 요건을 갖춘 유력기업을 통신산업에 참여시키기로 결정했는 데, 그러한 기업으로 금성통신 동양정밀 대한통신 삼성GTE가 선정되었다.
그렇다면 왜 체신부는 전화의 대량공급정책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간편한 방법이라 할 수 있는 일원화 대신 복잡한 이원화의 길을 택했을까?이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유를 들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나라 통신에 대한 장기 비전이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70년대 중반까지 아우성치는전화 적체 문제로 이렇다 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정책 부재에 허덕이고있던 체신 부는 70년대 후반에 들어 전화시설의 대량 공급 및 현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통신산업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한 장기계획을 수립할 수 있었다. 즉, 앞으로 80년대 10년 동안에 전화 적체와 통화 품질의 불량 등 통신의 2대 과제를 완전히 해소함은 물론 외국에서는 일반화되고 있는 데이터통신과 팩시밀리 비디오텍스 등의 새로운 통신방식을 널리 보급하기로 하고,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통신사업 경영제도의 개혁, 디지털통신망 등 새로운 기술의 도입, 통신산업의 육성을 중요한 정책 과제로 내세웠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 목표를 조기에 달성하자면 전자교환기의 기종을 다원화함으로써 세계에 서 가장 우수한 기종을 도입하여 가급적 빨리 기술을 익히고 생산하는 것이바람직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체신부장관 특별보좌관으로서 이러한 장기계획 수립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 통신기술연구소 경상현 부소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기종의 일원화와 이원화에는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하나의 기종만 사용하면그렇게 편할 수가 없습니다. 둘을 택하면 그만큼 복잡해지죠. 기술 습득도 그렇지만 부품 따위를 2배로 쌓아 놓고 있어야 하니까 그만큼 복잡해질 것은뻔한 일이죠. 그러나 80년대 10년 동안에 통신산업이 성숙한 단계에 들어서게 해놓고 90년대를 맞아야 한다는 대명제 아래 통신산업을 발전시키려 한다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통신시설을 갖추고 있는 나라들과 접촉해서 가급적 빨리 배우는 게 중요합니다. 필요하다면 둘 아니라 세 기종도 배워서익히는 게 좋습니다. 생산하는 기술 측면에서 볼 때도 마찬가지죠. 여러가지 기술을 보고 배움으로써 많은 이익을 얻게 됩니다.
또 앞으로 많은 통신망을 확장하자면 되도록 비용을 적게 들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제1기종만 사용하는 것보다는 약간 성질이 다른 기종을 들여옴으로써 둘 사이에 가격 경쟁을 시켜 비용 절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연구 끝에 제2기종을 들여오기로 했던 겁니다." 그와 같은 이론적인 필요성 외에도 제2기종을 도입해야 할, 현실적인 필요성 이 대두되었다. 제1기종으로 선정된 M10CN의 경우 수용 용량이 부족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따라서 통화량이 많은 서울 등 대도시용 교환기 로 부적합하다는 것이 M10CN이 설치되기 시작하면서 판명되었다.
"M10CN으로 늘려 나가다가는 큰일나겠더라구요. 근본적으로 용량이 너무 적어 도시용 교환기로는 적합하지 않았어요." 당시의 체신부 계획국장 이응효의 주장이었다.
제2기종 선정의 실무 책임자였던 정도길 기술정책관이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 했다. M10CN이 채택되기 전까지 저희는 벨지움에 가보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그 후에 가보니까 BTM 공장이 구미의 KTC 공장만도 못했습니다. 연간 생산 능력 이 30만회선밖에 안되는데, 우리가 요구하는 연간 1백만회선은 그들 능력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어요. 그래서 제2기종을 도입하기로 결정했던 겁니다. 또 하나 현실적인 문제점으로 대두된 것은 교환기의 도입 가격이었다. ITT 제품의 M10CN은 후지쯔 제품에 비해 50여달러불 비쌌으나 기술도입 조건이 유리하기 때문에 수입가격을 최대한 인하한다는 조건으로 선정되었다는 것은전술한 바 있다. 그리고 실제로 단가를 제시 가격에서 50여불 인하하는 조건으로 채택했다. 또 KTC에서 직접 생산하기 전에는 10만회선까지 ITT에서 직수입하기로 했는데, 실제로는 1차로 2만회선, 다시 2차로 12만회선의 완제품 을 도입했다. 그런데 입찰을 실시할 당시 회선당 2백달러선이던 단가가 1차 분 도입시에는 3백5달러로 뛰었고, 2차분 도입시에는 회선당 7백50달러를 요구했다가 4백30달러로 낙착되는 등 석연치 않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ITT의 독점에 의한 횡포를 막아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도 했다.
76년 최초로 응찰했을 때 ITT가 제시한 금액은 회선당 4백50달러였다. 그러한 가격을 2백달러까지 깎아가며 계약에 응했던 것은 그들대로의 계산이 있었다. 그 당시 ITT는 한국을 거대한 잠재시장인 중국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가격이나 기술전수 등 여러가지 불리한 조건을 감수하며 웬만큼 밑지는 장사가 되더라도 반드시 한국시장에 진출하려 했다. 때문에 그들은 "1회에 한해 인하한다"는 조건을 붙여가며 회선당 2백달러의 계약에 응했던 것이다.
계약 당시에 2백달러이던 단가가 1차분 도입시에 3백5불로 뛰어오른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계약 당시의 쌍방간의 기준화폐는 US달러가 아닌 벨기에의 프랑이었다. 그런데 계약을 맺고 나서 납품이 되기까지의 1년 동안에달러에 대한 벨기에 프랑의 시세가 계속 뛰어오르는 바람에 교환기 가격도 따라서 올랐던 것이다.
전자교환기종의 이원화를 채택하게 된 데는 이와같은 논리적인 요소 외에도눈에 띄지 않는 비논리적인 요소도 상당히 작용했다. KTC와 체신부간의 관계소원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전자교환기 조립업체인 KTC가 등장함으로써 기존의 질서가 여지없이 깨졌다.
KTC가등장하기 전까지는 교환기의 수요처인 체신부와 공급처인 생산업체사이에는 상부상조하는 끈끈한 유대관계가 맺어져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타난 KTC가 그들 사이를 차단하고 나섰다. 그러면서 체신 부에 대해서는 동등한 동반자 관계를 요구했고, 기존의 교환기 생산업체에 대해서는 상하관계를 요구했다. 따라서 체신부로서는 관행도 모르고 굽신거 릴 줄도 모르는 공급자를 만난 셈이었고, 기존의 생산업체로서는 어느날 갑자기 하청업체로 전락하여 부품을 생산, 납품해야 하는 상전을 만난 셈이었다. 이와 같은 돌발적인 상황 전개는 생산업체를 국영화하는 정책 자체에서부터 배태되었던 것이다. KTC의 경영진에도 문제가 있었다. 우선 이만영사장의 경영경험 부족이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순수한 학자 출신으로 원리원칙 에 충실한 이사장에게 이해관계에 민감하고 두뇌회전이 빠른 관료들은 너무 벅찬 상대였다. 때문에 그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제자인 박근혜를 통해 박대통령에게 직소했기 때문에 더욱더 체신부 관료들로부터 미움을 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