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정보통신 비사 소리없는 혁명 (15)

81년 9월 오명 체신부차관이 한국전기통신연구소의 최순달 소장과 경상현 선임연구부장을 체신부로 불러들였다.

전기통신연구소(KETRI)는 국보위의 각종 연구소 통폐합작업에 따라 서울에 있는 통신기술연구소(KTRI)와 창원에 있는 전기기기시험연구소가 합쳐져 81 년 1월에 발족한 과학기술처 산하의 연구소였다. 애초에는 구미에 있는 전자 기술연구소까지 통합하기로 했으나, 이 연구소의 차관선인 세계은행(IBRD)이 계약 위반임을 들어 반대하자 이 연구소와의 통합은 뒷날로 미뤄졌다. 그러나 전자기술연구소를 통합한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전기통신연구 소 소장인 최순달이 이 연구소의 소장 자리를 겸하고 있었다.

한편 신설된 전기통신연구소는 조직을 간소화한다는 연구소 통폐합 원칙에 따라 3개나 되던 부소장 자리를 전부 없애고 그 대신 부소장급에 해당하는선임연구부장 자리 하나만 남겨 두었다.

"연구소에서 요청한 대로 2백40억원을 지원한다면 디지털전자교환기를 개발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오차관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는 최소장의 표정에는 자신이 없었다.

"하는 데까지 하다가 안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땐 제가 사표를 내겠습니다." "사표를 내서 될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습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시도해본 적이 없는데, 이번에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몇백억원짜리 대형 프로젝트가 계속해서 가능하게될 것이고, 여기서 실패한다면 당분간은 대형 프로젝트를 생각하기 어려울겁니다. 따라서 이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난다면 다른 과학자들이 큰 프로젝트를 할 길을 막는 셈이 되기 때문에,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발전을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겁니다." "잘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차관의 강력한 개발 의지를 전달받은 최소장과 경선임연구부장은 그 프로젝트를 맡는 것이 숙명임을 느끼며 차관실을 빠져나왔다.

연구개발비 2백40억원의 프로젝트. 비록 5년에 걸친 장기 프로젝트이긴 하지만 그것은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군장비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10억원 대의 프로젝트도 구경하기 힘들었으므로 2백40억원의 프로젝트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실제로 두 연구소를 통합하여 발족한 전기통신연구소의 81년도 연구개발비 가24억원이었고, 그 중 전자교환기 개발에 투입된 연구비가 1억 6천만원에 불과했는데, 단일품목의 전자교환기 개발에 매년 50억원을 쏟아붓는다는 것은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구나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 기술 수준으로 극소수 선진국에서나 수출하고 있는 시분할전자교환기를 개발할 수 있다고장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한 엄청난 연구개발비를 무슨 수로 조달 하느냐는 난제도 가로놓여 있었다.

그런데도 오차관은 시분할전자교환기 개발에 자신의 자리를 걸기로 했다.

나름대로의계산이 있었고, 또 믿는 데가 있었다.

우선 전기통신연구소의 과제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전자교환기의 개발이며, 교환기의개발에 성공한다면 다른 분야의 연구 실적이 전혀 없더라도 연구소 를 지원해줄 가치는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교환기 문제가 해결되면 전화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누구보다도 우리나라 연구원들 의 잠재력을 믿고 있었다.

국방과학연구소 시절에 포병용 컴퓨터를 개발한 경험이 있는 오차관은 우리나라 기술 수준으로도 그 수준이 어느 정도냐가 문제일 뿐 기본적으로 작동하는 교환기는 개발할 수 있다고 믿었고, 또 연구개발이 가져오는 부수적 인효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2백40억원의 연구개발비를 놓고 최광수 장관을 설득하는과정에서 잘 나타났다.

"현재의 우리나라 기술 수준으로도 최소한의 성능을 갖는 디지털전자교환 기를 개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것이 경제성이 있느냐 없느냐, 또 기술적으로 봐서 외국 제품과 경쟁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지만 최소한 교환기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2백40억원이면 충분합니다. "경제성이 없으면 어떻게 할 거요?" "그렇게 되면 연구개발을 계속해 나가면서 당분간은 외국 교환기를 쓰면됩니다. 그 대신 우리 교환기를 만들어 내놓으면 원가계산을 정확히 할 수있고 또 상대편과 비교할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에 10% , 20% 깎는 것은문제가 없습니다. 2백40억원이 많은 것 같지만, 5천억원어치 교환기를 사는데 10%만 깎아도 5백억원이 됩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10%는 깎을 텐데그렇게 되면 두배 장사는 되는 것이고, 20%를 깎으면 4배 장사는 되는 겁니다. 이처럼 연구개발이란 반드시 제품을 만들어 성공시켜야 되는 게 아니고, 물건 값을 깎기 위해서라도 하는 겁니다." 이러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오차관의 입장에서는 전자교환기의 개발을 적극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자교환기는 전자산업 발전을 위한 3대 전략 품목의 하나로 선정되어 어차피 정부에서 그것의 개발을 적극 추진하기로 되어있었다. 게다가 김재익 경제수석으로부터 그것의 개발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와 성원을 받아 놓고 있는 터였다.

80년말부터 청와대 경제비서실은 전자산업 육성 방안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시작했다. 그 해 겨울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수립한 후 처음으로 마이너 스성장을 보인 불안하고 우울한 경제침체기였다. 게다가 비상계엄도 해제되 지않은 정치 변혁기였다. 그런데 업계에서는 컬러TV를 생산하고 있었으나 국민계층간에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비경제적인 논리에 의해 컬러TV의 방영뿐만 아니라 시판까지 금지되고 있었다. 때문에 전자산업체들은 극심한 경영난에 빠져 있었고, 미국에서는 컬러TV를 방영도 시판도 하지 않는 나라에서 어떻게 남의 나라에 수출을 하느냐며 빈정대기도 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정부의 규제를 푸는 일이 우선 시급했다.

"그 1단계 조치가 컬러TV의 시판과 방영조치였습니다. 그것은 돈이 들어가는일도 아니고, 무슨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어요. 그저 학자들과 전자산업체들이 이렇게해야 한다는 일을 하라고만 하면 되는 일이었죠. 아니, 정확 히말하자면, 하지 말라고 하지 않은 것뿐이었죠. 그러나 그 조그만 조치는 우리나라 전자산업의 성장.발전에 엄청난 기폭제가 되었던 거죠."당시의 청와대 경제비서실 모비서관의 말이었다.

전자산업의 육성계획 수립작업은 김재익 경제수석과 오명.홍성원 비서관으 로구성된 청와대 경제비서실팀이 주도했으나, 실무작업은 상공부.경제기획원. 재무부.체신부.과학기술처 등 경제부처의 실무 책임자와 산업계 및 연구소 의간부 등 20명으로 구성된 특별작업반이 담당했다. 3개월간의 작업 끝에 마련된 "전자산업 육성방안"은, 86년까지 생산은 1백5억달러, 수출은 70억달러로전자산업을 3배 이상 성장시킨다는 전제하에 종전의 가전 중심의 전자산업 을반도체.컴퓨터.전자교환기 등 3대 전략 품목 중심의 산업용 전자와 부품산업육성으로 전환시킨다는 획기적인 내용이었다. 특히 3대 전략품목에 대해서는기업간의 공동연구사업을 통해 추진하도록 함으로써 불필요한 경쟁적 연구 개발 투자를 지양케 했다.

구체적인 육성방안으로서 집중적으로 검토된 사항은 정부가 산업체를 묶고있는 각종 규제를 푸는 일과 금융.세제 등 각종 제도상의 지원을 강화하는 일이었는데, 기업의 활성화와 자유기업주의 창달을 위해 전자산업 분야에 대한 행정 규제를 최대한 줄이는 작업을 했다. 따라서 80년대의 전자산업정책 은 지원의 강화보다는 규제의 약화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이러한 작업의 주역 중의 한 사람이 체신부차관으로 임명되었으니 전자교환기 개발 문제를 챙기지 않을 수 없었다.

청와대 경제비서실 오명 비서관에게 시분할전자교환기의 개발 가능성을 맨 먼저 심어준 사람은 통신기술연구소 제2부소장 안병성이었다. 81년 1월 오비 서관의 요청에 따라 청와대를 방문한 안부소장은 시분할전자교환기의 개발이 가능함을 역설하며 정부의 적극적인 예산 지원을 요청했고, 그 무렵부터 오비서관의 머리속에는 전자교환기 개발사업을 국가적인 프로젝트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뚜렷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안병성.박항구 등 개발 프로젝트를 꾸준히 추진해온 연구원들을 만나 개발 가능성을 타진하는 동안 성공에 대한 확신이 굳어지고 있었다.

비록 용량이 적고 성능이 미흡하긴 하지만, 연구소팀은 이미 시분할전자교 환기를 개발한 바 있으며, 또 그것을 발전시키려는 의욕과 열의를 충분히 엿볼수 있었다.

오비서관에게 전자교환기 개발의 필요성을 역설한 또 하나의 인물은 체신 부기획예산담당관 김영도였다. 4급 행정직으로서 전자교환기에 대해 이렇다할식견을 갖지 못한 그가 어느날 업무상 자주 만나는 오비서관에게 브리핑차 트를 준비해 전자교환기의 개발계획을 설명한 다음, 이 계획의 추진을 위해 체신부 간부들에게 압력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체신부 간부들을 직접 설득 하기에는 과장이라는 자신의 지위가 너무 낮았던 것이다. 그때 마침 오비서관은 전자산업 육성 계획을 수립하고 있던 때여서 자연스럽게 체신부에 검토 지시를 내릴 수 있었다.

김영도 과장이 전자교환기 개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연구소측의 전자교환기 개발 책임자인 안병성.박항구 박사팀의 로비활동의 결과였다. 그들은 77년 12월 통신기술연구소가 설립된 이후 체신부로부터 매년 1억원 내외의 연구비를 지원 받아 전자교환기 개발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그런데 80년에는 이 프로젝트에 대한 지원비가 끊긴데다 81년에는 연구소의 통합작업 이 이루어지면서 연구소도, 체신부도 이 프로젝트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 우선 체신부 입장에서는 전기통신사업의 공사화라는 국가적인 계획이 진행 되고 있어 다른 일에는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79년말에 개통된 제1 기종인 M10CN교환기의 고장이 잦아 그것의 안정적인 운용이 최우선 과제로 대두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자교환기 관련 주무부서인 체신부 기술조정관실 에서는 디지털교환기 개발 문제는 젖혀놓고 이미 설치된 아날로그교환기의안정적인 운용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예산 확보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