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펑크족 "비트"창문 통해 새세상 꿈꾼다

토요일 오후,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시베리 거리의 어느 사이버 카페. 신 시사이저가 묵직한 저음으로 하우스뮤직을 연주한다. 볼륨을 죽인 TV에서는스탠리 큐브릭의 사이버펑크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가 기괴한 화면들을 쏟아낸다. 테이블에는 PC가 한대씩 올라앉아 있다.

홀 안은 헐렁한 티셔츠에 너덜너덜한 청바지를 입고 흑맥주를 마시는 십대 들로 가득 차 있다. 함께 어울려 주말 한때를 보내는 젊은이들 같지만 사실 이들은 서로에게 전혀 관심이 없다. 각자 인터네트를 즐기며 혼자만의 사이 버스페이스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인터네트에는 필요한 모든 것이 다 있다. 공짜정보나 전자우편함에 쌓인편지들뿐만이 아니다. 지구를 뒤덮은 이 거대한 네트워크의 세계는 영화관, 콘서트홀, 방송국, 은행, 도서관, 박물관으로 북적거린다. 콜라 자판기와 피자가게까지 들어서 있는 완벽한 가상의 공간이다.

요즘 미국과 유럽에는 하루에 8시간 이상씩 사이버스페이스에 틀어박혀 지내는 젊은이들이 무서운 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이들의 이름은 사이버 펑크 cyberpunk 족. 지피족이라고도 불린다. 사이버펑크가 사이버네틱스와 펑크 의합성어인 것처럼 지피는 집시와 히피의 신조어다.

런던에서는 사이버카페의 원조격인 윗필드가의 "사이베리아"에서 매일 지 피들의 집회가 열리고, 60년대 히피족들의 무대였던 샌프란시스코 헤이트 애 시베리의 크고 작은 사이버카페들은 한밤중까지 불이 훤히 켜져 있다. 동경 에서는 오타쿠 족이라 불리는 젊은이들이 하루종일 집에 틀어박혀 컴퓨터와 씨름하며 지낸다.

인터네트 사설게시판 "웰(Well)"은 사이버펑크족의 본부이고, 잡지 몬도2000 은 이들의 기관지이며 "보잉보잉(http://www.zeitgeist.net/public/Boi ng-boing/bbw3/boing.boing.html)"은 가장 인기있는 웹 사이트이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것 만으로 책을 빌려보고 물건을 사며 월트디즈니의 새 영화를 감상하고 카드결재로 피자를 배달시켜 먹을 수 있는 사이버스페이스는이들에게 가상의 무릉도원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사이버스페이스에 열광적인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기성사회의 시선 은곱지 않다. 거리의 부랑아처럼 단정치 못한 옷차림을 한 대인기피증 환자 들로 몰리기도 한다. 가상공간에서 손가락으로 얘기하는 데 익숙해지다 보니말로 하는 대화를 꺼리게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전산망 이곳저곳에 감춰진 정보를 빼내 무료로 나누어 주는 하이테크 범죄자"라는 오명도 쓰고 있다. 농업사회엔 곳간의 쌀을, 산업사 회엔 은행의 돈을, 정보사회에선 네트워크의 정보를 빼내는 것이 도둑이라는 것. 그러나 천재적인 컴퓨터실력으로 소프트웨어를 배포하는 사이버펑크 정보도둑들은 자신을 "사이버스페이스의 로빈후드" 또는 "네트워크 카우보이" 로 지칭하며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있다.

미국 매사추세츠 MIT대 컴퓨터공학과 학생들은 전세계에 공짜 프로그램을 배급하기 위해 "무료소프트웨어재단(Free Software Foundation)"을 만들어 운영하기도 한다.

이들은 정보독점이 반사회적 행위이며, 해커들은 묶여 있는 정보를 자유롭게풀어주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사이버펑크의 헌장에 따르면 사이버스페 이스에서 모든 네티즌들은 평등하며 어떤 권력기관의 간섭도 없이 정보를 나눌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미국 최대의 청년 압력단체 "이끌어라 아니면 떠나라 Lead or Leave)"는 보다 발전적인 사이버펑크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회장 롭 넬슨이 자비 1천달러를 들여 만든 이 단체는 지난 93년초 두 명에서출발해 지금은 1백만 회원을 거느린 거대조직이 됐다. "이끌어라 아니면 떠나라" 는 기성세대인 여피족들을 비난한다. 80년대 월 스트리트에 출현한 엘리트들 인 여피족은 "미이즘(Me-ism)"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만큼 철저한 이기주의와 호화판 소비생활로 미국 경제를 곤두박질치게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여피들의 사회적 무관심을 공격하며 인터네트가 신세대들의 새로운 민주주의 실험장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네트워크를 통해 활발하게 토론 을 벌인 뒤 입장을 정리해 이를 단체행동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이른바 정보 시대의 민주주의 "텔레데모크라시(TeleDemocracy)"를 실현시키자는 얘기다.

사이버펑크, 이들은 과연 자폐증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환자들인가, 아니면정보의 평등주의를 실천하려는 휴머니스트들인가. 판정은 유보할 수밖에없다. 분명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공간이 신세대들의 생활터전으로 자리잡기 시작했으며, 사이버펑크족들은 0과 1의 비트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상인 사이버스페이스에 처음 발을 내딛는 선구자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신세계 에 알맞는 철학과 건전한 문화를 뿌리내린다면 21세기의 프런티어로 기억되겠지만 만일 실패한다면 말초적 환락을 좇아 전자회로를 헤맸던 정보사회의 집시로 사라져갈 것이다. 【이선기 기자】